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혜경 Aug 16. 2023

유쾌한 나라

상상의 나라로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기 이전에 

이해하고 웃음으로 포용할 수 있는 동네를 꿈꾸며  



몇 년 전, 종종 찾아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었다.

토크 콘서트 형식인데 방청객들의 이야기가 중심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날의 주제가 있어서 방청객이 미리 주제와 연관된 사연을 적어내면 몇 개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 주인공을 찾아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한 의견을 자유롭게 덧붙인다.


단상에 각 분야 전문가라 할 만한 사람 두 명과 대체로 연예인인 초대 손님이 앉고, 이들과 조금 사이를 두고 옆으로 초대가수들이 (대개 2~3명 정도의 그룹이다.) 앉아 있다. 사회자가 단상 단하를 가리지 않고 왔다 갔다 하면서 진행하기 때문에 격식을 따지지 않는 편안한 분위기가 좋았다. 

사이사이 전문가가 덧붙이는 견해도 특별한 지식을 알려준다는 차원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식이어서 다른 이야기들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갔다.


슬픈 이야기부터 감동적인 이야기, 우스운 이야기 등 정말 다양했는데,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나눌 것 없이 다들 따뜻하고 공감 능력이 컸다. 누군가 부모님의 이혼이나 사별, 사회에서 받는 차별, 어려운 형편 등등에 대해 이야기하면, 자신도 그랬는데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하며 힘내라고 또 다른 누군가가 말해준다. 

환경미화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젊은이가 자신은 이 직업이 자랑스러운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하면, 아니라고 너 훌륭하다고 박수를 쳐준다.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착한 사람만 모아 놓았나, 아니면 미리 짰나 하는 의구심이 생기기도 했다. 행복지수가 낮고, 돈 있다는 사실만으로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고,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배타시 하는 사회와는 전혀 다른 세상인 것 같아서였다. 


도덕 교과서에선 중요하다고 설파하지만 실생활에서 무시된 지 오래인 이타심, 희생정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여기선 오롯이 살아 있었다. 비리와 부정은 일부 재벌이나 고위공직자들에게서나 보이는 것이고 보통 사람들은 이처럼 건전한 걸까? 비리를 저지를 정도로 유능(?) 하지 못하기에 이처럼 착하게 살아가는 걸까?

 

다른 이의 이야기에 울고 웃고 같이 분노해 주는 이들을 보며 팍팍한 현실을 잠시 잊었다. 바로 녹아버리는 아이스크림처럼 값싼 위안이라는 자성이 한편에서 고개를 들지만, 어쨌거나 훈훈한 사람들을 보는 건 위로가 되니까.


     




특히 인상적인 부부가 있었다. 

그날의 주제는 버스였는데, “남편은 버스 기사, 길치입니다.”란 사연의 주인공이었다. 

기사가 길치라니? 그게 가능해? 궁금한 마음으로 TV 앞으로 다가앉았다. 

40대 중반 되었을까 싶은 여성이 마이크를 잡았는데, 울산에서 왔다고 했다. 뚱뚱한 몸집에 안경을 썼다. 눈썹을 다소 진하게 그려 입 다물고 있으면 세 보이기도 할 인상이지만, 넘치는 웃음이 그런 느낌을 지워버렸다.


남편의 길치 증상은 연애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경주 나들이를 가는데, 좌회전 우회전을 하지 못해 계속 직진만 했다고. 그러다 보니 경주를 지나쳐 포항까지 갔고, 할 수 없이 거기서 도로 뒤돌아 직진해서 돌아왔다. 

결혼한 지 9년 차라 수없이 처갓집을 다녔지만 아직도 "여기서 꺾어? 저기서 들어가?" 하며 계속 묻는다. 내비게이션이 있지만 설명을 잘 알아듣지 못해 아내한테 묻는다.


그러면 버스는 어찌 운전하나? 

역시 아내 없이는 못 한다. 

운행 전날 미리 정류장과 길에 대해 아내가 가르쳐주면 외운다. 그런데 그렇게 외워도 잊을 때도 많다. 그럴 때는 손님에게 물어본다고 한다. 어느 날은 정류장을 지나친 것도 모른 채 가다가 좀 이상해서 뒤를 보니 지나쳐온 정류장에서 사람들이 손을 흔들고 있더라고. 그래서 다시 돌아가 태우기도 했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그래서 이 노선을 자주 이용하는 승객들은 아예 기사 바로 뒷자리에 앉아 알아서 길 안내를 해준다고. 그러다 보면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누게 되고 친해진다고 하면서, 승객들이 먹을 것도 챙겨주고 좋아해 줘서 행복하다고 활짝 웃었다. 


기사가 되기 전에 사무실 안에서 일했는데 갑갑해서 싫었다고, 지금 버스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도 나누는 게 너무 즐겁다고 하니, 길치인데 운전이 적성에 맞다는 모순이 성립하는 것이었다.


이야기는 주로 아내가 하고 남편은 곁에서 웃음으로 맞장구를 친다. 

둥근 눈매가 순박해 한 눈에도 선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길을 가르쳐주면 “아하! 그렇구나!" 한다는 표정이 세상 부러울 게 없는 어린아이의 얼굴이다. 이야기하는 아내의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하다. 내용은 남편의 실수담이지만 전달하는 어조에 애정이 듬뿍 담겨 있다.




나도 따라 웃으면서 푸근한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정류장을 지나치면 승객들이 지나쳤다고 알려주고, 기사 뒷자리에 앉은 할머니가 "아니 아니, 그쪽 말고 왼편으로 꺾어야 혀.” 말해주면 기사는 “아하!” 하며 방향을 바꾸는 버스. 

버스에 오르면서 “안녕하세요?" 인사하고 승객끼리도 “어제 친정 다녀온다더니 잘 다녀왔나?" "감기 심한 건 좀 어뗘?" 하며 담소를 나누는 버스. 

보퉁이에서 떡 몇 덩이, 사과 한 알 꺼내서는 기사에게 건네고, 기사는 함빡 웃으며 잘 먹겠습니다, 인사하고.

 

이 길을 지나는 사람들도 너그러우리라. 

정류장을 지나치다 후진하는 버스를 보며 아니, 저 버스 기사가 미쳤나 하지 않고, 아하! 또 그 기사님이구나, 하며 웃어넘기고, 유난히 웃고 있는 얼굴이 많은 버스를 보며 손을 흔들어 줄 것 같다.


사람이 바글바글 복잡한 대도시에서는 절대 꿈꿀 수 없는 풍경이리라. 

남보다 빨라야 성공한다는 일념으로 휘몰아치는 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다. 

경쟁이 중요하지 않으므로 천천히 해도 괜찮고 그래서 실수도 용인되는 사회, 

여유와 느린 속도가 용납되는 사회에서나 가능할까.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비판하고 지적하기 이전에 이해해 주고 웃음으로 포용할 수 있는, 나와 전혀 다른 성향이라서 이해할 수 없더라도 그대로 인정해 주는 동네, 불가능하려나?

작가의 이전글 정원에서 유영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