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혜경 Sep 08. 2023

별들의 소리

별들의 소리를 듣고 싶어



용평 시내에서 용평리조트 방향으로 10여분 가다 보면 도암댐 표지가 나온다. 

왼편 길로 접어들면 인적 없이 나무들만 늘어서 있는 호젓한 산길이다. 초 저녁인데도 벌써 적막한 어둠이 내려앉아있다. 오가는 차량도 없어 우리 차 헤드라이트에 비친 곳만 어슴푸레 보일 뿐, 주변은 아주 캄캄하다.


도시에서라면 환한 불빛 아래 저녁을 먹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하고 있을 텐데, 서울에서 200여 km 떨어진 이곳은 아득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와 멀고 외딴 공간에서 유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시계를 다시 본다. 저녁 7시를 막 넘겼을 뿐이다.


‘동생네 산장까지 이렇게 오래 걸렸던가.’


계속 이어지는 어두운 산길이 살짝 불안해지기 시작할 무렵,

“원래 이렇게 한참 갔니?” 뒷좌석의 어머니 목소리가 이상하게 갈라져 들린다. 


드디어 희미한 빛이 보인다. 산장 들어가는 길목에 서있는 수하산 문화학교이다.

왈칵 반갑다.


밤에 도착한 적이 없어 이렇게 어두울 줄 몰랐다. 휴대폰 전등을 비춰 더듬더듬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연다. 그런데 이게 웬일?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방마다 다니면서 온갖 스위치를 올려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집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은 곧 불안감으로 바뀌었다. 

관리해 주는 아저씨가 와서 여기저기 손 봐도 변화가 없다. 결국 한전에 연락하고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난방이 안 되니 실내에 있어도 추워지기 시작했다. 

이불장에서 담요를 꺼내 두르고 들 앉아 있었으나 한기가 가시진 않았다. 자동차 히터로라도 몸을 좀 녹일까 하고 뜰로 나왔다. 

어느 정도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자작나무 몸통이 희부옇게 들어온다.

싸늘하지만 숲의 향이 섞인 공기가 서느러니 폐부에 닿는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아, 얼마 만에 보는 별들인가.     


밤하늘 가득,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검은색 천 사이사이 박힌 보석들처럼 빛나고 있는 별들. 

반짝반짝하는 모양이 마치 경쾌한 율동을 하는 것 같았는데, 그것은 다시, ‘괜찮아, 괜찮아’ 친근하게 속삭이는 소리들로 바뀌어 들렸다. 


초겨울의 찬 대기를 찰랑, 흔드는 청량한 은방울소리들.




<무진기행>의 주인공이었던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분해서 못 견디어하던 인물이. 

별을 보고 있으면 자신의 어느 별과 또 다른 별들 사이의 안타까운 거리가 뚜렷이 보이는 것에 어쩔 줄 몰라하던, 그 별 들 사이의 도달할 길 없는 거리를 보며 괴로워하던 청춘의 초상.

 

나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으나, 이제 세월이 흐르니 많은 것에 여유로워진다. 

나와 다른 것, 기대치에 못 미치는 것, 예상과 다른 결과들에 대해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웃어넘기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다.


나와 너 사이, 나와 별, 별들 사이의 거리란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거리를 인정하면 편안해지는 것을, 젊은 날엔 그 거리가 왜 그리도 멀어 보였는지, 멀다는 사실이 왜 그리 막막했는지…… 그 시절 모습이 오래된 사진처럼 정겹게 떠오른다.


또 오래전 케냐 마사이마라에서 올려다보던 밤하늘도 생각났다. 

대자연 속이어서인지 어른 주먹만 한 별들이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가까이에서 반짝이던 밤하늘. 

아름답다는 탄성이 절로 나오던 장관이었다.


묵고 있던 숙소가 현대식 건물이 아니라 넓은 땅 드문드문 지어진 천막과 돌집이었는데, 저녁이면 전기도 끊어지고 더운물도 끊겼다. 방에 전화도 없어 직원을 부르려면 천막집 여럿을 지나 꽤 떨어진 호텔 사무실까지 걸어가야 했다.


걷는 것도 어둠도 익숙하지 않아 불편해하던 우리 일행은 별무리를 보는 순간 모든 투덜거림이 잦아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상에는 모닥불이 주변을 밝히고 하늘에는 큼직한 별들이 빛을 뿜어내고 있는 밤. 


먼 옛날 우리의 선조들이 별을 보며 느꼈을 황홀함을 알 것 같았다. 

별들이 태양계에서 어떤 위치에 있고 몇만 광년 떨어져 있고 하는 사실은 몰라도 상관없었다. 단지 밤하늘을 화폭 삼아 펼쳐지는 별들의 그림에 매혹되고 별들의 운행에서 아름다운 음악소리를 들으며 카시오페이아 왕비며 오리온 장군이며 켄타우로스들의 이야기를 상상하면 될 뿐이었다. 

문명과 과학의 발달이 인류에게 편리함을 안겨 주었지만 무한한 상상력을 앗아간 것은 확실했다.


이런저런 상념은 한전 직원이 도착하면서 사라졌다. 집 밖 전봇대에 매여 있는 변압기 퓨즈를 이어 주니 전기가 들어왔다.     


우리는 환해진 집안으로 들어왔고, 별이 수놓아진 밤하늘은 멀어졌다. 

밤하늘 대신 텔레비전 화면이 반짝이며 우리를 유혹한다.


도시로 돌아와 바쁜 일상을 다시 시작한 나는 밤하늘 보는 것을 잊었다. 

우리 머리 위로 축복처럼 쏟아지던 별들의 노래도 이젠, 들리지 않는다. 


    




별들의 소리를 기억하며 살아가기를....  





작가의 이전글 푸르른 시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