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꿈
아들애가 어릴 때 일이다.
장래 희망에 대한 글쓰기가 숙제라며 뭔가 열심히 끄적거리던 아들 애가 물었다.
나는 뭐가 되고 싶었던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잠시 기억을 더듬어 봤다.
초등학교 시절 나의 희망은 무용가, 교육가, 문학가였다.
무용가는 발레리나 만화 주인공을 흠모하다가 꿈꾸게 되었고, 교육가란 꿈은 페스탈로치의 위인전을 읽고 감동해서 생겨난 것이었다. 이 꿈들이 감정적이고 일시적인 것이었다면 문학가에의 꿈은 비교적 오래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꿈이었다.
어릴 때부터 문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데는 부모님이 마련해 주신 환경 덕이 크다.
아버지께서 출판업에 종사하셔서 늘 책과 함께 지낼 수 있었고, 어머니는 국문학을 전공하신 데다가 감성이 풍부하고 열정적이셔서 어린 나의 감수성을 알게 모르게 일깨워 주셨다.
밖에 나가 놀기보다 책 읽는 게 더 좋았고 지루해지면 뒹굴면서 책 장에 꽂힌 책들의 제목 읽는 것을 즐겼다. 그때 내가 좋아했던 책은 동화책들과 12권의 두툼한 백과사전이었는데, 사전 속에 곁들여진 세계 여러 나라와 명화들의 컬러사진들은 매일 들여다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엎드려 책을 보다가 장롱 밑 어두컴컴한 부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둠이 주는 묘한 느낌과 설명할 수 없는 슬픔 같은 것이 조금씩 차오르는 것 같았다.
어둠 저 편이나 발을 딛고 있는 땅 밑, 높다란 나무 꼭대기 위에 책에서처럼 다른 세계가 이어져있는 것은 아닐까, 난쟁이들이 집구석 어디엔가 숨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밥을 먹으면서는 이 밥알들이 사람이고 내가 신이라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하는 상상들에 싸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삶의 갈피갈피에 문학에 대한 관심을 지속시켜 준 만남들이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께서 선물해 주신 동화책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다른 아이들이 받은 책에 비해 내 것의 내용이 어렵다는 사실에 괜히 으쓱해하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어휘나 상황들을 멋대로 상상해 꾸며보았던 기억이 새롭다.
중학교에 가서는 두 번이나 국어선생님이 담임이셔서 문학에 대한 관심을 더욱 키울 수 있었다.
1학년 때 문집 1권을 만들어 내는 숙제를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했던 것과 3학년 때 선생님께서 읊어 주셨던 시를 귀담아듣던 것이 기억난다.
책을 통해 알게 된 세계는 나를 조금은 조숙한 아이로 만들어, 초등학교 시절에 어른의 세계를 거짓과 위선이 지배하는 것으로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겉으로는 얌전하고 모범적이었지만 속내는 건방지고 꽤 삐딱한 편이었으며, 강렬한 삶을 동경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속의 나’가 원하는 삶을 살만큼 용감하거나 끼가 있는 편은 못되고 좀 더 현실적이고 세속적이었다고 할까. 아무튼 내 삶은 문학 속 주인공과는 달리 정상적(?) 경로를 밟아왔다.
고등학교 때, 한 소설가의 생애를 다룬 기사를 읽고 충격받았던 기억이 난다. 얌전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어릴 때부터 몇 번에 걸쳐 가출을 시도했다는 사실에 “작가는 역시 달라.” 하면서 나 같은 범인은 작가가 될 수 없으리라는 열패감을 느꼈다.
일상적 질서로부터 자유로운, 불꽃과도 같은 삶은 내 실제 삶에서는 이뤄질 수 없음을 시인하면서, 나의 꿈은 소설가나 시인과 같은 ‘작가’가 아니라 문학 언저리에 존재하는 ‘문학가’가 된 것이다.
대학에 가서 여러 진로를 생각하다가 문학을 공부하는 길을 택한 것은 비일상적 삶을 꿈꾸었던 속마음이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문학 속 다양한 삶을 통해 작가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 고뇌를 공유하기도 하며 문학가에의 꿈을 한편으로 실현하고 싶었다.
소설 속에서 내 관심을 끄는 인물들은 별문제 없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쪽이 아니라 문제적이어서 겉돌거나 소외되는 자들이다.
타락한 세계의 가치에 희생되어 불행한 삶의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돈과 명성 같은 세속적 즐거움과 무관하게 자신의 열정을 좇는 자들, 모두 오른손잡이인 세상에서 홀로 삶을 당당하게 구현하는 왼손잡이의 삶 같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주된 흐름을 따르기 어려운 이들은 그 어긋남에 비극성이 배태되어 있는 것이고 그러한 부분들이 나를 안타깝게 하면서도 끌어당겼던 것이다.
한데 나이를 먹어가면서는 강렬한 빛을 향한 열망보다는 평안과 위로를 주는 따스한 온기에 끌리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자유나 열정에의 꿈을 간접적으로 경험케 해온 문학이 이젠 안온하게 숨을 수 있는 도피처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뭐든지 튀어야 하고 빨리 변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듯하다.
그렇지 않으면 도태된다고 외치며 내적인 가치를 더 이상 중시하지 않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내 어지럼증을 가라앉히는 것은 문학이다.
어느 평론가가 말했듯이 유용성이 중요해진 시대에 쓸모가 없어 보이는 문학은 바로 쓸모가 없기 때문에 피곤한 우리를 쉬게 한다.
쓸모 있는 사람들 속에서 주눅 들고 피곤해진 나는 쓸모없는 사람들이 힘겹게 삶을 영위하고 있는 소설 속에서 동질감과 위안을 느끼는 것이다. 중요하지 않다고 외면당하는 가치덕목을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는 인물들이 아직 건재한 곳이 문학 속 세계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 비범한 소설 속 인물을 꿈꾸게 만든 문학이, 이제는 비범하지 않아도 보잘것없어도 진실을 추구하는 일의 소중함을 알려주면서 위안을 주고 있다.
거창한 작품만이 아니라 주변의 사소한 이야기들도 충분히 감동을 전할 수 있음을 가르쳐주는 문학에 새삼 고마워하면서, 내 글도 누군가에게 힘과 위안을 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