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의 소설

[잔인한 도시] : 거짓자유의 도시

by 한혜경



이청준(1939-2008)은 폭력과 억압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꾸준히 지향해 온 작가이다.

집요하고도 꼼꼼한 탐구로 이 세계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했던 그는 「잔인한 도시」에서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거대해진 금권과 그 아래 왜소한 인간들을 그렸다.


교도소에서 출감한 사내가 교도소 근처 공원에서 지내다가 새의 자유에 숨겨진 놀라운 비밀을 발견하고 결국 고향을 향해 떠난다는 설정을 통해, 거짓자유가 난무하고 믿음과 정이 사라진 사회를 우화적으로 제시한다.


거짓 자유와 타산이 지배하는 도시


「잔인한 도시」에 등장하는 도시는 실제 있을 법한 구체적인 공간이 아니라 교도소와 그 위 공원으로 이루어진 가상의 공간이다.



교도소는 도시의 서북쪽 일각, 벚나무와 오리나무들이 무질서하게 조림된 공원 숲의 아래쪽에 있었다.

그리고 그 무질서한 인조림이 끝나고 있는 공원 입구께에서 2백 미터 남짓한 교도소 길목이 꺾여 들고 있었다. 공원 입구에선 교도소 길목과 높고 음침스런 소내 건물들을 제 손바닥 들여다보듯 한눈에 모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중략) 하지만 그 길목은 언제부턴가 사람의 눈길을 끌 만한 움직임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



도시 한편에 있는 교도소와 공원이 이 소설에 등장하는 공간의 전부이다.

‘무질서하게 조림된’ ‘인조림’이라는 표현에서 아름다운 공원이 아니라 삭막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더욱이 이 주변은 교도소를 나오는 출감자들의 모습이 뜸해지고 면회객들의 발길조차 자취를 감추고 있다고 하여 적막함이 강조된다.


그러나 밤이면 높다란 감시탑들의 불빛이 확고부동하게 비추이므로 세상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을 뿐 교도소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교도소의 탐조등 불빛만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밤의 도시는 살벌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교도소는 감금과 차단의 공간이다.

갇힌 자들이 편지를 써도 가족에게 전달되지 않으며 점차 면회자들이 드물어지다가 완전히 끊겼다는 사실은 수인들이 외부와 철저히 차단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이에 비해 공원은 자유롭고 즐거운 공간으로 추측하기 쉽지만 사실은 또 다른 억압이 가해지는 곳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교도소를 막 출감한 사내이다.

낡고 작은 사물보퉁이를 들고 ‘조그맣게’ 걸어 나오는 사내는 낡은 옷차림에 ‘허옇게 센 머리털’로 지치고 무기력하게 보인다.


그는 공원 입구의 ‘방생의 집’에서 발길을 멈춘다.

방생의 집은 새장에 들어있는 새를 사서 날려 보내는 집이다.

이 가게의 주인은 “서른이 좀 넘었을까 말까, 하관이 몹시 매끈하게 빨려 내려간 얼굴 모습이 어딘지 좀 오만스럽고 인색스런 인상을 풍긴 데다가 차가운 백동테 안경알 속에서 눈알을 몹시 영민스럽게 굴려대고 있”는 차가운 분위기의 남자이다.


사내는 다음날 아침 공원에 떨어진 동전들을 주워 모아 새를 사서 날려 보낸다.

왜 집에 가지 않느냐는 가게 주인 젊은이의 비아냥에 사내는 가족이 없어서 가지 않는 게 아님을 완강하게 강조한다.

그의 고향집은 ‘주위엔 탱자나무 울타리가 높게 둘러쳐지고 뒤꼍으론 대밭이 무성하게 우거진 규모 있는 기와집’으로 ‘집터가 시원하게 트이고 게다가 햇볕도 깊’은 곳이라고 자랑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곳에 아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아들은 사내에게 생명 이상의 존재로 ‘녀석이 없었으면 난 아직도 저 가막솔 나올 생각도 않았을지’ 모를 정도로 큰 의미를 차지하고 있다.


그가 곧바로 집에 가지 않고 공원에서 지내는 것은 아들이 찾아올 것을 기다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감옥 안의 동료들을 위해 새를 사기 위해서이다.

새를 사서 날려주는 것은 그들에게 자유를 사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들은 “날개를 산다”라고 말한다.

곧 새를 날려 보내는 것은 ‘잠깐의 장난거리’가 아니라 아직 갇혀 있는 동료의 자유를 기원하는 엄숙한 행위인데, 이 새들에게 부여된 자유가 가짜라는 데 문제가 발생한다.


가게 주인 젊은이는 낮에 풀어준 새들을 밤이면 다시 잡아들인다.

날개 아래 속깃을 잘라냈기 때문에 멀리 날아가지 못한 새들은 밤이 되면 다시 사내에게 포획되는 것이다.

결국 새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것이며 거짓자유이므로, 공원은 새를 날려 보내면서 자유의 꿈을 꾸었던 자들을 잔인하게 배신하는 공간이다.


공원의 젊은이는 도시를 대표하는 인물로 수인들의 꿈이나 새의 자유는 안중에 없다.

오직 돈벌이에만 관심이 있으므로, 상업적 이윤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이 불안해하든 괴로워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오만스럽고 인색스런 인상’에 ‘매끈한 얼굴’을 가졌으며 ‘차가운 백동테 안경알’을 쓰고 있는 그의 외모는 깔끔하지만 쌀쌀한 도시사람의 분위기를 풍긴다.


그가 사내를 대하는 태도는 ‘차가운 조롱기’ ‘노골적인 비웃음기’를 지니고 ‘어떤 경멸 기를 숨기고 있음에 틀림없는 소리’로 말하고 ‘딱해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는 사내와 이야기하다가도 손님이 들어서면 곧바로 주의를 돌리는 민첩성을 보여준다.

곧 그는 이윤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은 냉혹한 인물로 작가는 이를 통해 도시의 잔인함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IMG_7588.jpg 루이스 멘도의 작품 (Mundo Mendo Fantastic City Life 전시 중)




불빛 앞의 무력한 새


어두운 밤 공원을 휘젓는 전깃불 앞에서 꼼짝 못 하는 새들은 무력한 인간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감옥 안에서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우송되지 않는 것 같아도 변변히 항의 한 번 못하고 외부와 차단된 채 하루하루 연명하며 살아가는 죄수의 모습은 거대한 체제의 힘에 굴복당한 채 살아가는 왜소한 현대인을 연상시킨다.


이들의 특성은 침묵으로 나타난다.

감옥 안에서도 항의 한번 못하는 이들은 감옥을 나와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렵게 출감하여 세상으로 나온 사내는 이윤이 최고가치가 된 사회체제에 적응하지 못한다.

이윤만 있다면 다른 사람의 권리나 삶이 어떻게 되든 상관 않는 매서움 앞에서 그는 침묵할 뿐이다.


밤에 새들을 도로 잡아들이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고도 악몽에 시달릴 뿐 항의하지 못한다.

그리고 새의 날개를 자른 사실을 알았을 때도 ‘세찬 분노’를 느끼지만 젊은이에게 비난의 말을 하지 않는다.


한동안 조용히 잘려나간 녀석의 속날개깃 자국을 들여다보고 있던 사내의 눈길에 이윽고 어떤 세찬 분노의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그는 새를 거머쥔 손에 으스러지도록 힘을 주며 말없이 그의 거동만 훔쳐보고 있는 젊은이를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그 세찬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리는 사내의 눈길은 사람까지 온통 달라 보이게 하였다. 그는 자신의 분노 때문에 손과 입술까지 마구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는 자신을 참는 데 너무도 길이 들여진 인간이었다. 그는 끝끝내 한마디 말도 없이 자신의 분노를 견뎌냈다.



참는 데 길이 들어 격렬하게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는 모습은 눈물겹다.

솟구쳐 오르는 분노의 불길을 잠재우려는 노력에 의해 분노는 슬픔으로 변화된다.

곧 분노와 증오의 빛 대신 “조용한 슬픔의 응어리 같은 것이 맺혀 들기 시작” 한다.


잘못된 체제나 대상을 향해 발산되지 못한 분노는 안으로 스며들어 내면에서 응축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내의 모습은 외부대상을 향해 저항하지 못하고 침묵하는 왜소하고 무력한 인간상을 잘 보여준다.


이에 비해 정작 악행을 저지른 젊은이의 태도는 당당하다.

처음부터 사내를 조롱하고 비웃던 그는 시종 ‘냉랭한 눈길’로 바라보는데 사내가 새의 날개깃을 잘라낸 흔적을 발견한 뒤에도 태연하다.

오히려 ‘비웃음과 연민기 같은 것이 뒤섞인 미묘한 웃음기’ 속에 유유히 사내를 구경하는 여유를 보인다.

이러한 젊은이의 모습은 잘못된 행위에 대한 반성 또는 성찰이 전무함을 시사한다.

곧 이윤 외에는 어떤 일에도 흔들림 없이 잔인한 존재인 것이다.


결국 이처럼 비정한 도시에서 버틸 수 없는 사내 쪽이 물러서게 된다.

공원에서 새를 사는 것이 부질없음을 깨닫고 그렇다고 젊은이의 장사를 중지시킬 수도 없으므로 사내는 새와 함께 도시를 빠져나온다.


도시에서 고향집 사이에 있는 공간은 신작로이다.

고향이 있는 남쪽을 향해 구불구불 뻗어있는 길은 미래로 열려 있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깊이 아껴뒀던 돈으로 새의 자유를 산 그는 이제 고향에 대한 기대로 행복하다.

등줄기에 닿는 한 줄기 햇볕의 따스함을 느끼며 또 “남쪽으로 뻗어나가고 있는 신작로길이 그토록 따뜻하고 맑게 빛나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사내의 가슴속을 끝없이 비춰주는 영혼의 빛줄기와도 같았다”라고 하여 그를 지탱시키는 것이 영혼임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 따스함이 영구적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따뜻한 햇발이 “점점 더 풀기를 잃어”가고 신작로도 “차츰 윤곽이 아득히 흐려져 가고” 있으므로, 낮의 온기는 곧 다가오는 밤에 밀려날 것이며 겨울의 냉기에 얼어붙을 것을 암시한다.


겨울이 오기 전에 고향에 도착해야 푸른 대숲에서 지낼 수 있으나 그가 말했듯이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찾기는 어려운 곳’이므로 그들의 여정이 빨리 마무리되기는 어려우리라는 예감을 준다.


결국 사내의 이야기는 현실적인 조건과 무관한 희망에 관한 이야기이며 정신적인 차원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돈 따위는 중요하지 않으며 누가 자신을 알아주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

새를 사서 날려 보낸다고 해서 갇힌 자가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므로 젊은이의 시각으로는 ‘부질없는 짓’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없는 돈을 아껴서라도 새를 사고 싶어 한다.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또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은 것처럼 다른 동료들도 원했던 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들의 바람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익을 중시하는 실리주의자들이 볼 때 어리석은 행동이 이들에게는 중요하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믿음과 같은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새가 사내를 믿고 날아들었던 것처럼 믿음이란 한 가족이 되게 하는 요소로 가족이란 그 사이에 믿음이 존재하는 관계임을 시사한다.

따라서 고향은 타산적 도시에서 소외되던 이들에게 유토피아이다.

남쪽에 있어 따뜻하고 가족과 사랑이 있어 따뜻하다.


이렇게 볼 때 「잔인한 도시」는 이윤을 중시하는 타산적 사고에 의해 타인의 자유마저 무시하는 도시를 벗어나는 인간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잔인하다’는 형용사로 수식된 도시가 이익위주, 자본주의 사고를 대표한다면 그 대척에 있는 고향은 믿음을 중시하고 가치위주의 사고를 하며 정과 사랑을 강조하는 곳이다.

고향을 잊지 못하는 자들은 잔인한 도시에서 견디기 어려움을 보여주면서, 역으로 도시의 각박한 삶을 견디게 하는 것이 고향에의 꿈이며 사랑과 믿음임을 보여준다.


남쪽 고향을 향해 구불구불 뻗어있는 길은 고향에 도착하기까지 쉽지 않은 여정을 암시하지만 아직 따뜻한 햇볕이 남아 있어 이들의 고향 가는 길을 비춰줄 것이다.




차가운 도시에 사는 이들에게 따뜻한 햇볕이 골고루 비추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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