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왕] : 숲과 동물, 사람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유토피아
<에너지의 날> 스무 해
김영래의 <<숲의 왕>>(2000)은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자연과의 동화(同化)를 추구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소설로, 제5회 문학동네 소설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동서양의 신화와 철학 사상을 예화로 들면서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의 신성함을 지키려는 자들의 이야기를 풍부한 상상력과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려낸다. 숲과 동물, 사람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축복받은 정원을 통해 개발과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무분별하게 파헤쳐져 신음하고 있는 우리 산하를 돌아보게 한다.
강원도 기린이라는 곳에 ‘에피쿠로스의 정원’이 있다. 평창 나들목을 지나 국도를 따라 다섯 시간 넘게 우회를 해야 나타나는 이곳은 신화 속의 공간 같은 느낌이다. 숲 사잇길로 한참 가야 나타나는 공간. 2km가량 계속되는 전나무 숲길을 지나면 또다시 활엽수림의 긴 터널이 이어지고 그 어귀에 비로소 정원의 입구가 나타난다.
정원의 입구에는 ‘에피쿠로스의 정원’이라고 새겨진 현판이 있고 기둥 한쪽에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진 편액이 붙어있다.
‘REX NEMORENSIS’는 ‘숲의 왕’을 뜻하는 라틴어인데, 위의 내용은 이 정원에 사는 사람들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잘 보여준다. ‘숲의 형제단’으로 불리는 이 공동체는 정원의 주인인 정지운을 포함해 모두 7명의 남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사업가로서 산업 폐기물 수입에 반대하고 환경 정보에 관한 자료를 보유할 수 있는 정보 센터를 건립하는 등 중요한 환경 운동의 중심에 서있는 정지운, 토목기사였으나 식물의 일대기를 다룬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숲에 합류한 성준하, 환경 단체에서 일하던 박성우, 목수였던 가문비, 가인(歌人)이었던 오르페, 폐가전제품을 수출해 큰돈을 벌다가 어느 날 ‘서울의 하루’라는 통계 자료를 접하고 새 삶을 모색하려 이곳을 찾은 깡통 등. 이들은 각기 살아온 여정은 다르지만 이곳이 삶의 귀착지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맨발로 흙을 밟고’ 서기로 결심한 자들이다.
그리고 정원에서 좀 떨어진 마을에서 기거하며 농사와 숲의 모두를 관장하는 산지기 임 노인과 인간의 언어를 모르는 대신 새들의 노래를 알아듣는 그의 아들 성치(聖痴), 당나귀 플라테로와 가문비의 친구인 수퇘지 다루, 이외에 많은 짐승과 꽃, 나무가 있다.
이곳의 삶은 단조롭다. 빛이 있는 동안은 누구나 함께 일을 하며 새벽이나 해가 진 뒤에는 각자 자유롭게 보낸다. 밥과 국, 두세 가지의 반찬으로 식사를 하며 육식은 피하고 물과 과일이 유일한 간식이다. ‘숲과 사람과 짐승이 한데 어우러져 아무런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 이곳에서는 말없이 주고받는 시선으로 교감이 가능하다.
이들의 외모도 이들의 삶과 식탁처럼 정갈하다. 정지운은 ‘보통 사람보다 이삼 도쯤 체온이 낮아 보일 정도로 안색이 창백’하지만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데, 그 이유는 ‘눈과 입 언저리에 새겨진 잔주름들이 웃음의 숨길 수 없는 곡선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거의 속삭이듯이 말을 하지만 그러면서도 뜻이 정확하게 전달되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음성은 부드럽고 물처럼 듣는 사람을 감싸는 데가 있다. 체구는 아주 왜소하지만 몸가짐은 단정하고 ‘무엇엔가 사로잡힌 사람이 뿜는 광채로 인해 사람을 사로잡는 데가 있는 눈빛’을 하고 있다.
‘된서리가 내린 머리, 깎은 듯 만 듯한 거친 수염’의 준하는 ‘늘 딴 세상에 젖어 있는 듯한 표정’으로 언제 보아도 범접하기 힘든 사람으로 보인다. 1미터 50이 조금 넘는 가문비, ‘작은 체구에 소심해 보일 정도로 조신한’ 성우 등, 후에 합류하는 늑대청년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왜소하고 말수가 적으며 정적인 인물들이다.
숲의 형제단의 대화나 성우의 일기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단어는 형제애와 우정, 평화와 같은 말들이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물론이고 동식물과도 공존하면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을 ‘형제애’와 ‘우정’으로 표현하면서 여러 사례를 인용하고 있다.
가령, 정지운은 에피쿠로스에 대한 존경심을 ‘우정을 존중했던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우정은 춤추면서 세상 주위를 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외친다. 일어나서 행복한 사람을 칭송하라고.”라는 에피쿠로스의 잠언을 좋아한다. 이러한 우정의 세계는 동식물과 무생물까지 아우르는데, 멕시코의 아즈텍 족의 이야기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이처럼 모든 존재와의 형제애와 우정을 존중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자들은 준하의 애니메이션 원고에서 식물의 이미지를 입고 나타난다. 곧 몸에 엽록소가 있어 푸른 살갗을 가진 사람들인데 바로 나무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들은 광합성이 가능하므로 살기 위해 다른 생물을 먹거나 다른 생명으로부터 양분을 흡수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엽록소가 없는 흰 살갗 사람들은 식물을 먹고 동물을 죽이며 살아야 한다. 살기 위한 욕구는 더욱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한 욕망으로 변질되어 이들의 탐욕은 결국 푸른 나라를 멸망시키고 지구를 황폐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이야기에는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다. 여성 인물이 없을 뿐 아니라 여성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 다른 대상에 대한 사랑을 형제애와 우정으로 표현하는 것도 그 사랑이 이성애나 이성에 대한 끌림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과의 사랑으로 인한 갈등, 생산과 번식에 대한 욕망이나 관심도 나타나지 않는다.
“백당나무, 흔히 불두화라고 하죠. (중략)" “부드럽고 서늘하고 촉촉하고 말랑말랑한 이 감촉. 미색의 얇은 면사 뒤에서 맨살로 숨을 쉬는 듯한…… 어서요. 아니, 그렇게 말고, 손바닥을 동그랗게 오므리고서. 그래요. 그리곤 눈을 감아 봐요.”
준하가 불두화 꽃송이를 어루만지며 성우에게 그 느낌을 설명하는 장면으로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관능적인 장면이다. 그런데 그 관능의 대상은 꽃이며 더 나아가 무성 식물이다. 아름답지만 무성식물인 불두화를 가리켜 준하는 수분과 번식이 불가능하니 그 자체가 ‘탈속과 불기(佛器)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번식이 불가능한 점을 성스러운 관능으로 연결 짓는 준하의 생각은 이들의 정원에 여성이 없다는 사실과 연관된다.
이렇게 볼 때 이들에게는 물질적 욕망뿐 아니라 혈연에의 집착이나 종족 번식에 대한 욕망도 부재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혈연 간이 아니라도 생각이 같은 사람끼리 모여 살면 가족이 되는 것이므로,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식물처럼 광합성을 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며 하늘 아래 모든 생물과 무생물까지도 형제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정은 춤추면서 세상 주위를 돈다.”
‘숲과 사람과 짐승이 한데 어우러져 아무런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 에피쿠로스의 정원.
이러한 유토피아가 과연 지속될 수 있을까?
인근 마을이 오지 개발 사업으로 술렁거리기 시작하면서 에피쿠로스의 정원도 와해의 위기에 놓인다. 스키장과 골프장, 호텔, 콘도미니엄 등을 갖춘 대단위 리조트를 건설하기 위한 대규모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에 맞서기 위해 숲의 형제단은 정원의 생일날 산신제, 나무를 위한 위령제, 개발의 무모함을 알리는 퍼포먼스, 성명서를 낭독하고 산탈 부적을 붙이는 의식 등을 계획한다. 그런데 이러한 행사가 한갓 ‘소심함과 패배주의적인 의식’의 소산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늑대청년이란 별칭을 갖고 있는 그는 정원의 계획이 “소도축업자들에 맞서 무저항 운동을 벌이는 힌두교도들 같다”라고 비판하면서 정원을 지키려면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현장의 중장비의 엔진통에 흙을 쏟아부어 공사를 방해하고 “저 산을 난도질하고 있는 자들의 서울 추장을 붙잡아 머릿가죽을 벗기지 않는 한” 해결할 수 없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현장 소장의 항의와 위협이 이어지고 주민들조차 “지역 발전 저해하는 환경 단체 자폭하라.”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시위를 하는 가운데, 정지운의 시신이 발견되고 개발 회사의 서울 사장이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
결국 리조트 사업 계획이 백지화되는데, 숲의 형제단에도 의견충돌이 일어나 균열이 생긴다. 의문의 화제로 숲이 불타면서 세 사람이 죽는 사건으로 숲의 공동체는 완전히 와해된다.
그렇다면 ‘숲의 왕’은 무엇을 의미할까?
다양한 신화를 통해 반복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숲의 왕’의 이야기는 숲의 지도자나 왕이 부족을 위해 희생된다는 기본 골격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신화에 의한다면 정지운의 죽음은 ‘숲의 왕’으로서의 희생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설은 그의 죽음을 의문사로 처리함으로써 명확한 언급을 피한다. 그 대신 현실적으로 숲을 가꾸고 지키는 자가 ‘숲의 왕’이라는 사실을 소설 끝에서 암시한다. 곧 홀로 남은 산지기 임 노인이 검게 타버린 정원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땀 흘려 일하는 모습에서 진정으로 숲을 아끼고 사랑하는 자가 왕이라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다.
임 노인은 서른 살에 ‘풀과 물의 세상을 지켜라.’라는 의미의 글자를 건네받는 꿈을 꾼 이후 고향 기린에서 산지기로 살아온 자이다. 숲의 형제단 중 지도자의 역할을 하던 자들이 떠나거나 죽음을 맞는데 비해, 묵묵히 일만 하던 임 노인이 유일하게 남아 숲을 지키는 것은 시사적이다.
그는 불에 타 죽은 나무들 위로 새싹이 움트는 것을 보며 자연의 소생력과 치유력을 발견한다. 도토리 한 알이 잿더미 속에서 딱딱한 껍질을 벗고 견과 속의 속살을 두 쪽으로 나누며 그 틈으로 연둣빛 뾰조록한 싹을 밀어 올리고 있는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것이다. 곧 죽은 나무들이 죽음에서 끝나지 않고 다시 숲을 부활시키는 밑거름이 되는 것을 보며 희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다. 그리고 봄이란 죽음을 견디고 그 위에서 새로이 탄생하는 것임을 역시 깨닫는다.
우리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