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로 이루는 치유의 한 마당 :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박완서는 나이 마흔에 <나목>이란 소설로 문단에 등단한 이후 수많은 소설과 산문집을 출간했다. 일흔이 넘어서도 필력이 약해지지 않았고 세상을 뜨기 얼마 전 산문집을 출간할 정도로 왕성하게 창작활동을 했다.
대표작을 꼽으려 해도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많은 작품들이 독자와 평단의 사랑을 받았는데, 그중에서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을 읽어본다. 이 작품은 손위 동서와의 전화 통화라는 점에서도 독특한데,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어머니의 슬픔과 고통, 그리고 생각의 변화에 대해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란 소설의 제목은 김현승의 시 「눈물」의 한 구절을 따온 것이다.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 가지 않은/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주시다.
프롤로그처럼 작품의 모두에 놓여 있는 이 시로 인해 이 소설이 눈물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눈물일까?
1980년대 깜깜했던 시대, 시위 중 쇠 파이프에 맞아 죽음을 맞은 대학생의 어머니가 주인공이다. 손위 동서와의 전화 통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어 이웃집 여자의 신세 한탄을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생생하게 전달된다. 예기치 못한 아들의 죽음 앞에서 주인공이 느꼈을 억울함과 비통함은 말할 수 없이 절절했겠으나, 이 작품에서는 그 비통함보다 아들의 죽음 이후 그녀가 겪는 의식의 변화에 더 중점을 둔다.
아들이 죽은 지 7년이 넘은 시점에서 그 엄청난 고통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왔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서 1980년대 어두웠던 사회 현실과 손위 동서, 친구와의 관계 등 중년 여성의 일상적 삶도 함께 녹여낸다.
아들을 잃은 뒤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그때까지 중요하게 생각해 온 것이 하나도 안 중요해지고, 하나도 안 중요하게 여겨 온 것이 중요해진 거”다. 곧 “전엔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 가 중요했는데 이젠 내가 보고 느끼는 내가 더 중요”하며 “전엔 장만하는 게 중요했는데 이젠 버리는 게 더 중요”하게 된 것이다.
우리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성찰하게 하는 이 변화는 존재를 인식하는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전에는 형체가 있어 눈에 보이는 것만 중요한 줄 알았는데 그 후엔 아니었어요. 눈에 안 보이는 걸 온종일 쫓은 적도 있어요. 아녜요. 육체와 영혼의 문제가 아니라구요. 그건 나한테는 너무 거창해요. 장미꽃과 향기의 문제예요. 장미꽃은 저기 있는데 향기는 온 방 안에 있다. 향기는 도대체 어떤 모양으로 존재하는 걸까? 고작 그 정도예요.
“물건은 분명히 하난데 두 가지 방법으로 존재할 수도 있다.”라는 사실은 행운목에 꽃이 펴서 온 집 안이 향기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때, 소꼬리를 끓이다가 태워서 버렸는데도 온 집 안에 고약한 냄새가 가득 남아 있을 때, 확인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아들의 존재도 충만하게 느낄 수 있음을 고백한다. 외출에서 돌아와 집 안에 아무도 없으면 “창환아, 에미 왔다.”라고 아들에게 말을 거는데, 그럴 때는 집 구석구석이 아들로 가득 차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그 애 안에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되므로 눈에 보이지 않아도 존재를 감지할 수 있음을 감동적으로 보여 준다.
한편, 주인공이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견디는 모습은 눈물겨우면서도 상당히 이성적이다.
처음에는 “그놈의 쇠 파이프가 눈이 멀어도 분수가 있지 앞장선 열렬한 투사들 다 제쳐 놓고 왜 하필 우리 창환이었을까.” 하는 마음에 "미치게 억울"했으나 ‘죽음은 어차피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아들이 죽은 후 민가협 엄마들을 따라 민주 투사 공판에도 가고 시위 현장을 따라다녔는데, 그 행동을 스스로 분석하고 있기도 하다. 죽음이란 ‘철저하게 개개의 것’이라는 사실이 무서워 "집단적인 열정 속으로" 휩쓸려 피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또 자신이 힘들어하는 것을 남에게 들키기 싫어 평정을 가장한다. 실상은 "무거운 수레를 끄는 것처럼" 고통스러운데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도록 ‘눈물겨운 노력’을 해 온 것이다. 견딜 수 없을 정도에 이르면 은하계 주문을 외면서 울음을 자제했는데, 이처럼 "기를 쓰고" 꾸며온 꿋꿋함이 일시에 무너지는 경우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것은 교통사고로 뇌와 척추를 다치고 하반신 마비에 치매까지 온 아들을 돌보고 있는 친구의 집에서 일어난다. 아들을 향해 “아이구 이 웬수, 저 놈의 대천지 웬수”, “어서 처먹고 뒈져라” 말끝마다 욕을 달고 오랜 병구완으로 ‘파파 할머니’가 되어 있는 친구의 모습은 ‘지옥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황폐해 보인다.
그러나 친구는 ‘죽는 것보다 더 못한 꼴’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보인다. 꿋꿋하게 잘 버티는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는 주인공과 달리, “내가 이 웬숫덩어리 때문에 제명에 못 죽어.”, “아이고, 하느님,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 이 꼴을 보게 하십니까?” 말하고 싶은 대로 내뱉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악담만 남은 듯한 거친 말투와 행동 이면에 ‘씩씩하고도 부드러운 자애’가 숨어 있으며, 아무 의식 없이 흐리멍덩해 보였던 아들의 눈 역시 ‘신뢰와 평안감의 극치’의 표현임을 깨닫게 된다.
잠시도 쉬지 않고 입을 놀리면서도 환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마사지해 주는 친구를 보며 주인공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생명의 실체’가 부러워 울음이 복받친다. 은하계 주문도 막지 못해 터져 나오는 울음을 통해 그녀는 비로소 ‘기를 쓰고 꾸민 자신’으로부터 놓여난 것 같은 해방감을 느끼고 그 후로는 ‘울고 싶을 때 우는 낙으로’ 살고 있다.
즉 ‘막혔던 울음’이 터지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꾸며 왔던 지난 세월이 모두 함께 녹아 떠내려가게 된 것이다. 단단하게 뭉친 응어리를 녹이고 슬픔과 한을 흘려보냄으로써 모든 것을 정화시키는 눈물의 힘을 보여 주는 장면이라고 하겠다. 슬픔을 슬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는 눈물의 힘은 늘 ‘절벽 같은 침묵과 잔뜩 꾸민 목소리’로 일관했던 형님도 움직이게 한다. 소설 끝에서 형님이 울고 있다는 것은 눈물로 이루는 공감과 치유의 장을 인상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