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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혜경 Oct 27. 2023

의미로부터의 자유

내 빛깔과 향기에 걸맞는 이름을 위해서 



“이 작품에서 ‘저녁’의 의미는 작품의 배경 시간을 나타내면서 삶이 이우는 때를 뜻합니다. 여기서 작중인물들은 매일 저녁 낡고 너덜너덜한 화투를 치면서 시간을 보내지요. 그것은 이들의 삶이 마치 낡은 각본을 갖고 연극하는 것과 같다는 통찰을 드러내고 있어요. 그러니까 ‘게임’이 뜻하는 것은……”


오늘도 나는 학생들에게 소설 속 상황에 대해 분석해 준다.


매일 저녁 식사 후 화투를 치는 아버지와 딸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 소설에서 화투놀이가 의미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인물들의 관계는 어떠한지, 작가가 나타내고자 한 주제는 무엇인지 등을 열심히 설명하면 학생들은 자못 진지하게 노트도 하며 듣는다.     


그런데 이따금 "의미는 무슨 의미, 그냥 저녁마다 화투 치는 이야기로 읽으면 어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그럴 때면, 그냥 겉으로 드러난 것만 받아들이면 안 되냐는 질문이 학생들 속에서 나오지 않나 은근히 기다려보기도 한다. 막상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표면의 현상 뒤에 숨은 이면의 진실을 찾아야 한다고, 그 숨어 있는 의미를 캐내는 것이 진정한 독서의 즐거움이라고 엄숙하게 말할 거지만 말이다. 


문학작품을 읽고 분석하고 가르치는 게 일이다 보니 작품에 나타나는 다양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늘 작품을 여러 번 읽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다가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과 사건들을 통해 구현되는 의미 찾아내기에 슬며시 꾀가 나면서 회의에 빠져들 때가 있다. 


이런 작업이 무슨 의미가 있나, 소설 하나 올바르게 이해한다고 해서 또는 잘못 분석한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지는 게 있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파악하기 어려운 의미를 해독해 내고선 흐뭇한 성취감을 느끼는 때도 있지만, 의미를 찾고자 눈을 부릅뜨고 있는 내가 먹이를 찾는 사냥개같이 생각되기도 해 헛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너무 많은 의미들 속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자그마한 행동 하나에도 "나라를 위해서"라든가, "명예를 위해서" 같은 명분 붙이기를 좋아하고, 그렇게 그럴듯한 의미가 붙어야 안심하곤 한다. 


특별하지 않은 물건도 사랑이나 우정에 필요한 것이라는 의미를 붙여놓으면 불티나게 팔리는 상품이 되고, 사소한 의미들이 모여 보편적 관습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어릴 때 인상 깊게 들었던 꽃 이야기가 기억난다. 


‘며느리취’라는 꽃이 그 특이한 이름을 얻게 된 데는 불쌍하게 죽은 며느리의 슬픈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옛날에 힘들게 시집살이하던 며느리가 어느 날 밥을 푸다가 너무나 배가 고픈 나머지 주걱에 붙은 밥풀 몇 알을 떼어먹었다고 한다. 그것을 본 시어머니가 작대기로 내리쳐 며느리는 그만 죽고 말았는데, 며느리의 한이 그 집 뒤뜰에 꽃으로 피어났다는 것이다. 


하찮은 풀꽃 하나에도 관심을 가진 누군가의 마음이 따스하게 다가 오기도 하지만, 그 작은 풀꽃에까지 이름과 의미를 붙이는 것이 숨 막히게 여겨지기도 한다. 

이름 뒤에 거창한 배경 이야기를 달고 있으니 아무 의미 없이 홀로 서 있을 때에 비해 얼마나 무거운가.


요즘 들어 의미 붙이는 일이 버겁고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갈수록 강렬해지는 광고들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소비자들의 구미를 당기기 위해서 제품의 의미를 가능한 현란하게 포장한 광고들을 언제나 마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상품의 의미가 한껏 부풀려진 광고 이미지들이 자신을 외면했다가는 시대의 낙오자를 면치 못하리라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발산하고 있어, 그로부터 자유롭기가 어려운 것이다.


영화 광고나 뉴스들 역시 그렇다. 

과연 한 편의 영화가 이처럼 많은 것을 관객에게 줄 수 있을까 싶은 수많은 미덕들이 화려하게 나열되고, 뉴스의 제목은 자극적인 문구로 이루어져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멋지고 화려한 수식어들로 치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허약한 몸체들, 과장된 의미임을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듯 그것들을 묵인하는 사람들, 실체에 비해서 너무 과장된 것 아니냐는 질문 자체가 우문인 듯 한 분위기, 

이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잠시 방향을 잃고 방황하게 된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의미가 중요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삶이 새삼 특별하게 떠오른다. 


타인에게 보이는 것이 무엇이든 괘념치 않은 자들, 이들이 관심두지 않았던 의미들은 대체로 사회규범에 근거한 것들이었기에 이들은 의미로부터 자유로운 만큼 아웃사이더로서 살았다. 


어떤 성씨를 물려받았나 이름 석 자가 중요했던 시절, 잘못 불린 이름 ‘이상’을 그대로 자신의 이름으로 바꾸어 썼던 이상(李箱). 소설이나 시 또는 삶에 대한 기존의 의미를 무시한 그는 그 시대에 보편적인 의미들에 대항해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식민지 시대에 조국의 안위를 염려하는 것 같지도 않고 성실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삶을 살다 간 이상은 <날개>에서 드러나듯이 "펀둥펀둥 게으르게" 뒹굴면서 거울 장난이나 하는 인물을 그렸다.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없이 어린아이처럼 유희하듯이 살아감으로써 19세기적 의미들을 조롱한 것이다.


나 같은 범인들은 과장된 의미나 관습화된 의미에 반기를 들 수 있을까. 기껏 눈살이나 찌푸리면서 한숨이나 쉬는 데 그칠 뿐이리라.


한 시인이 읊었던 것처럼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나 사람들은 이름이 불려짐으로써 비로소 "잊혀지지 않는" 존재가 된다. 

곧 개개가 지니고 있는 의미란 존재의 이유이며 근거이지만, 자꾸 부풀려지면 알맹이는 간데 없이 포장된 의미만 남을 것이 우려된다.


그래서 불필요한 의미들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진정한 의미, 자기 몸에 딱 맞는 의미만 걸친 모습이 그리워지는 요즘, 

각각의 "빛깔과 향기에 걸맞는" 이름만 불려질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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