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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혜경 Nov 08. 2023

길 저편

길 저편에 무엇이 있을까


 출근할 때면 도로 상황에 따라 몇 가지 경로를 번갈아 이용한다. 

 

연희동을 지나 홍제천을 왼쪽으로 끼고 있는 길.

천변으로 굵직굵직한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고 오른쪽으론 나무들 사이로 허름한 식당 두엇과 우유대리점, 낡고 빛바랜 연립주택, 자전거포 등이 낮게 엎드려 있어 고요하면서도 쇠락한 읍내 분위기가 난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어 시간이 정지된 복고풍 영화의 세트장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나는 좌회전을 한다. 

신호를 기다리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직진 방향의 길이 시야에 들어온다. 

표지판을 보면 홍은사거리와 서대문 구청으로 가는 길인데, 일방이고 한 차선으로만 되어 있어서인지 그 길로 들어서는 차가 많지 않다. 


길 양쪽으로 벚나무가 무성하여 봄이면 화사한 꽃구름이 두둥실 떠있는 것 같고 

여름이면 신록의 나뭇잎들이 지나가는 자동차 지붕에까지 닿을 정도로 드리워져 있다. 

가을이면 누런 나뭇잎들이 바람에 우수수 흩날리고 

겨울이면 앙상해진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하늘의 창백한 빛깔이 보이고,

계절마다 운치 있는 풍경을 연출한다. 


길은 왼쪽으로 살짝 구부러져 있어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는 길이 시작되는 부분만 보인다. 

끝은 보이지 않고 연분홍 꽃무더기를 머리에 인 나무들 사이로 뻗어있는 한적한 길. 

조금 과장하면 천국으로 가는 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저 길로 한 번 가보리라 생각하지만 그때뿐, 늘 출근시간 맞추느라 허둥지둥하는 터라 실행하지 못했다. 


은희경의 소설 [아내의 상자]의 결말처럼 실망스러운 풍경을 마주할지도 모르니 꿈으로만 간직하는 게 나을 거야 합리화하면서....




[아내의 상자]는 획일적인 아파트와 신도시처럼 규격화된 현대사회에서 스스로 열등한 종자라고 규정짓는 여자의 파탄을 그린 소설이다. 


늘 공벌레처럼 웅크린 자세로 잠자는 폐쇄적인 여자와 달리 그녀의 남편은 규격화된 삶에 불만이 없으며 자신들의 삶이 평온하다고 생각한다. 

남편이 아내의 불안을 짐작하지 못하는 사이 아내의 상황은 돌아오기 어려운 방향으로 점점 치닫게 되고 결국 아내가 요양소에 들어가는 결말을 맞는다. 


그동안 살던 집을 정리하고 떠나는 날. 

남편은 예전에 아내가 가보고 싶어 했던 길로 접어든다. 


지리한 회색 포장도로가 아니라 풀이 북슬북슬한 방둑길 뒤로 연녹색 산속 오솔길이 나있는 곳.

1년 여 전에 아내와 불임클리닉에 가는 도중에 발견했던 길이다.


그날 갑자기 끼어들어 이들의 자동차를 추월한 두 대의 스포츠카. 

서로 상대차를 향해 물총을 쏘는 장난을 하며 깔깔거리던 젊은이들의 자동차는 이들이 가는 방향과 달리 방둑길로 접어들어 산속의 오솔길 뒤로 사라진다.


한참 그들을 바라보던 아내는 “저 길로 한번 가보고 싶어요.”라고 했고 

남편은 언제 한 번 나오자며 쉽게 약속한다. 

그러나 봄이 가기 전에 가보자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고 아내는 남편의 허락 없이는 나올 수 없는 요양소에 갇힌다.   


아내를 요양소에 두고 돌아가는 길, 남편 홀로 그 길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산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무덤으로 가득 뒤덮인 거대한 산이다.


예기치 않은 황량한 풍경에 남편은 당황한다. 

알맞게 구부러진 하얀 길에 꽃이 만발해 있어 선택된 사람에게만 열려 있는 길처럼 여겨졌는데 

그 예상은 보기 좋게 엇나간다. 

기대와 다른 삶의 민낯을 생경하게 드러내는 결말이다.




현재 서 있는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는 구부러진 길 너머.

그곳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하면서 주어진 길을 가는 것이 우리네 삶이리라. 

길 저쪽에 환한 풍경이 기다리고 있기를 소망하지만 매번 기대에 값하는 풍경을 만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실망스러운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열심히 걸었더니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누구나 이런 결과를 얻는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세상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그래서 길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탄생하는 것일 게다. 


탄탄대로도 있지만 구불구불한 산길이나 험한 돌이 박혀있는 길, 발이 푹푹 빠지는 진창길, 눈이 쌓여 걷기 힘든 길들이 있다. 

이 소설의 아내가 느낀 것처럼 선택된 사람에게만 열려 있고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닫혀버리는 길도 있을 것이다. 


목적지에 도착하려고 애를 써도 여전히 길 위에 있거나, 한참 지나왔는데 옳게 가고 있는지 의심스러워지고 잘못된 길이라는 깨달음으로 망연한 경우, 되돌아가자니 너무 멀리 와 어찌할 바를 모를 때도 있다.     


어떤 길을 걸어가든 그 여정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땀과 눈물로 얼룩져 있다. 

길 저편으로 돌아갔을 때 만나게 될 상황에 대한 두려움으로 불안할 수도 있다. 

그럴 때 힘을 북돋워주고  심신을 다독이는 무언가가 있다면 훨씬 수월하리라. 


그것은 길가에 핀 작은 들꽃일 수도, 또는 시원한 나무 그늘일 수도 있고, 따뜻한 말 한마디, 사랑하는 가족이나 벗이 내미는 손일 수도 있다. 

혹 기댈 것이 없더라도 절망은 금물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찬찬히 짚어보고 침착하게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이 중요하다. 


길 저편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일지 모르지만 쉽게 낙심하지 말 일이다. 






출근 때마다 지나가면서 가야 할 길에 대해 생각하게 하던 길은 이제 바뀌었다. 

오른편에 낡은 가게들을 허물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왼편의 천변으로는 주차공간이 들어섰다. 

그래도 좌회전할 때 보이는 길은 그대로 있어서, 요즘도 저 앞에 펼쳐진 길을 바라보면서 내가 갈 길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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