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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혜경 Nov 14. 2023

가을산, 나뭇잎...

가을을 보내며...


오후 느지막이 가을산 산책길에 들어섰다. 

계속되는 폭염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지난여름, 

울창한 숲으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던 나무들에서 하나둘 씩 잎이 떨어진다. 

 

떨어지는 것은 늘 여러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떨어지는 것은 장엄하지만, 채 피어나지도 못했는데 떨어지는 것이라면 애달프다. 

때가 되었음에도 떨어지기를 거부하는 것은 추하기까지 하다.


봄에 연한 싹으로 태어나 여름내 햇빛을 받고 물을 마시며 성장하다가 가을이 되어 떨어진 낙엽. 

자신의 소임을 충실히 다한 삶의 숭고함을 느끼게 한다. 

새삼 인간의 비루함이 서글퍼졌다. 


돌아오는 길, 건들건들 불던 바람이 세졌다. 

어느새 주위는 어스레해지고 꽤 많던 사람들도 빠져나가 고즈넉하다. 

걸음을 좀 빨리 해보는데 누군가 뒤따르는 듯한 기척에 흠칫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하지만 나를 지나치는 건 수런수런 부스럭거리며 바람에 굴러가는 낙엽들.


한바탕 바람이 다시 휘몰아치니 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그리곤 또 수런거리며 저만치 휩쓸려 간다. 

눈을 들어 보니 나뭇가지에 매달린 잎들이 아직 많다. 


남보다 빨리 떨어진 나뭇잎은 뭐가 그리 급했을까. 


저들은 가지에 매달렸을 때 행복했을까? 

화사한 봄 햇살이 따스하게 뺨을 간질이고 산들거리는 바람이 부드럽게 스쳐 지나갈 때면, 세상은 아름답구나 살아 볼 만하구나 느꼈을까?


오랜 가뭄으로 바싹 메마른 입술을 촉촉한 단비가 적셔줄 때, 아 힘을 내서 다시 살아봐야지 다짐했을까?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햇빛에도 하늘이 구멍 난 듯 내리붓는 폭우에도 꼼짝 못 하고 고스란히 온몸으로 받아내야 할 때, 

바람 따라 저기 저 산 넘어가고 싶어도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귀 가까이 청랑한 목소리로 노래 불러주다가 훌쩍 날아가는 새 쫓아 날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슬프지 않았을까? 


나에게 주어진 삶이 왜 이것뿐일까, 답답하지 않았을까? 

날아가고 싶다고 마음대로 날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곤 조금씩 포기하는 법을 배웠을 수도, 

더 높은 가지에 매달린 잎 때문에 제대로 하늘을 보지도 못하고 온전히 햇빛을 받지도 못할 때 억울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무력함을 느꼈을 수도 있으리라. 

그럴 때면 저 아래 땅에서 구르고 있는 낙엽이 더 자유롭게 보였을 수도.


이제 가지 위의 시간이 다해 지상에 내려와 다른 낙엽들과 이리저리 구르고 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삶의 마지막에 이르러 자유롭고도 편안한 마음으로 누워있을까? 

까마득히 멀어 보이는 나뭇가지를 올려다보며, 언제 내가 저 위에 있었던가 싶은 마음으로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고 있을까?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굴러가며 처음으로 사람들 가까이에 있어 본다. 

무심하게 지나가는 사람 발에 밟혀 바스러질 수도 있지만, 그들이 나누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재미나기도 하다.


갑자기 아르르 왕! 하는 소리와 어멋! 하는 소리가 거의 한꺼번에 들린다. 

두 여자가 데리고 가는 강아지가 무슨 까닭인지 마주 오는 여자에게 달려들었나 보다. 

물린 것은 아니지만 놀란 여자는 엉거주춤 서 있고 지나가던 남자가 가까이 가 몇 마디 거든다. 

개 주인인 여자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개를 데리고 제 갈 길을 간다. 


“무슨 저런 사람들이 다 있어. 참 재수 없으려니까......” 

“그러게요. 사과도 안 하고 가네요.” 


작은 소요가 지나간 후 길은 다시 조용해진다.


이 소동에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고요히 엎드리는 낙엽들. 

어느 날 청소부의 비질에 쓸려갈 수도 있겠지만, 혹 숲으로 날아 들어가는 잎도 있으리라. 

그러면 오래오래 누워 있다가 비 오고 눈 내리면 젖은 채 조금씩 조금씩 썩어 흙 속으로 스르르 스며들겠지.


그리 되면 편안히 흙과 하나 되어 지나가는 사람들 발소리 들으며 두런두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엿들으며 또 다른 생을 시작할 수도 있으리라.


나무에 매달린 잎들을 다시 올려다본다.

바람이 불어 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파르르 흔들린다. 


두어 시간 전 숲 입구로 들어서던 나를 본다. 

다정하게 손잡고 걸어가던 커플, 재잘거리던 꼬마와 엄마,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고 가던 사람들을 본다. 

개를 데리고 산책하던 사람들, 개 때문에 놀란 여자도 본다. 

바람 따라 수런수런 뭐라 하는 듯 스스스 쓸려가는 낙엽들을 본다. 


불쑥 질문 하나가 솟구친다. 

우리의 비루한 삶은 깨끗해질 수 있을까? 

대립과 갈등을 넘어서 평화로워질 수 있을까?      


답을 구하듯 하늘을 바라본다. 

바람이 또 한차례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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