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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혜경 Dec 12. 2023

슬픔의 얼굴

엄마의 일주기를 앞두고  

작년 12월 15일에 엄마가 우리 곁을 떠나셨다.

한 달 남짓 지났을 때 쓴 기록이다.

오늘도 엄마가 보고 싶다.  



 

 여전히 실감 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엄마가 없다는 사실이.

 특별한 일 없으면 2주에 한 번 가 뵈었으니, 지금도 댁에 계실 거 같다. 나를 보고 활짝 웃으며 반가워하실 거 같다.  


 엄마가 떠나고 한 달 남짓 시간이 흘렀다. 진득하게 앉아 있지를 못한다. 책 몇 장 읽다가 공연히 핸드폰 열고, 글 조금 쓰다가 일어나 서성이고,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눈물 어리고. 


오늘도 책을 읽고 있다가 불쑥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훑었다. 엄마 영정사진으로 쓴 사진을 찾아 들여다본다. 큰 동생 집에서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이다. 동생이 엄마 어깨를 감싸고 나란히 앉아 있는 사진인데, 환한 미소가 좋아 영정사진으로 썼다. 멋쟁이답게 목에 스카프를 두르시고, 나는 편안하니 너희도 걱정 말라고 하시는 듯 웃고 계신다.        


어릴 때 엄마는 내 롤모델이었다. 또래 여성들이 대학 가기도 어려운 시절에 석사를 마쳤고 미인이기도 해서, 난 왜 엄마를 안 닮았나 속상해했다. 유학 가서 더 공부하고자 했던 계획은 결혼하고 나를 낳으면서 접게 되었다. 이어서 남동생 둘까지 우리 삼 남매 키우는 데 주력하시다가 막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글쓰기와 서예를 다시 시작하셨다. 


이후 수필가로, 서예가로 활동하면서 대학에서 강의도 병행하셨다. 하나만 하기도 힘들 일에 모두 열정적으로 임하셔서 수필집 7권과 선집 3권을 내셨고, 대한민국 미술대전을 비롯한 여러 대회에서 입선을 했고, 국내외에서 십수 차례 서예전시회를 열고 서실을 운영하며 제자를 키우셨다. 


 이렇게 바쁘게 살아오셨으니, 좀 쉬라는 뜻이었을까. 

 3년 8개월 전 맹장염으로 수술하고 보름간 입원해 있다가 집에 돌아오신 엄마는 조금 달라졌다. 다른 건 다 그대로인데 기를 쓰고 매달렸던 것만 놓은 것 같달까. 그동안 온 힘을 다해 잡고 있던 것을 슬그머니 내려놓은 느낌이 들었다. 만족스러운 작품이 나올 때까지 쓰고 또 쓰고 하던 세월을 이젠 흘려보내고,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인 세계에 가 닿은 듯했다. 


예민하게 촉 세우던 더듬이가 순해지고, 꽉 조여있던 나사가 느슨하게 풀린 듯, 목까지 꽉 채웠던 단추를 한두 개 풀어놓아 헐렁해진 듯, 90년 엄마 생을 관통해 온 욕망과 노력들이 가라앉아 고요하면서도 허허로운 빈 들판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엄마 스스로 ‘악바리’라 표현한 대로, 엄마에게는 힘들다고 하면서도 밤을 새워서라도 완성하는 근성이 있었다. 그러다가 병나실라 쉬엄쉬엄하라고 하면, 그래서야 어떻게 책을 내냐면서 성질을 내곤 했다. 맹장 수술 직전까지도 한 달 남은 미수 기념 수필집 원고를 매만지고 전시회 일정 조율에 여념 없으셨는데, 수술 직후에도 수필집 걱정을 했는데, 그사이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수필집 얘기를 꺼내면 “나중에 해도 되지, 뭐. 안 내도 그만이고...” 하셨다. 


 그동안 써야 할 에너지를 다 쏟아부었으니 앞으로는 무념무상, 마음 편히 지내라는 하나님 뜻이었을까. 정말로 엄마는 그 뒤 순하고 편안해졌다. 불만이라곤 모르는 사람같이 수시로 “고맙다” “좋다” 하시고, 몸 어떠시냐고 물으면 “나야 잘 먹고 잘 자고 걱정이 없지.” 하시며 또 “고맙다”라고 함박 웃으신다. 안부 문자 드리면 “고맙다” “몸조심해라” “맛있게 먹어.” 꼬박꼬박 하트와 함께 답이 왔다. 


내 마음도 따라서 말랑말랑해져서 듣기 좋은 말 잘 못하던 내 입에서 오늘 우리 엄마 얼굴 좋아지셨네, 환해지셨네, 주름도 없고 피부 좋으시네, 이런 말이 술술 나왔다. 간병하시는 여사님이 정말 팽팽하시다며 옆에서 맞장구를 치면, 혀를 쑥 내밀고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엄지 척을 하셨다. 한바탕 웃음꽃이 피면서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운 시간이 흘러갔다. 



나혜영 교수 작품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엄마의 인지기능은 조금씩 나빠졌고 육체적으로도 기력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문자의 철자가 틀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처음엔 짐작할 수 있는 정도였는데 어느 날 보낸 문자는 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 대” “ㄷ ㅎ” “내 디” “ㅏ” “달아” “나 ㅐ 애” “내 ㅏ 달아” “내 도” 

이렇게 이어지고 있어 무슨 말인지 알아내기가 어려웠는데, 한참 오타가 이어진 끝에 완성된 문장은 “내 딸아!”였다. 생각지도 못한 문장에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그 뒤로도 철자 틀린 ‘내 딸’은 계속되었는데, 그러다가 작년 설에는 말로 표현하셨다. 

오후에 한 잠 잘 주무시다가 일어나시더니 “이제 일어나 나갈 거다”라고 하셨다. 꿈을 꾸셨나 해서 “꿈꾸셨어? 어디로 가실 건데?” 물으니 “아무 데고 나갈 거야. 내가 나가도 슬퍼하지 말아.” 하셨다. 순간 할 말을 잃고 멍해졌는데,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시더니 “내 딸, 이쁘다.” 하며 미소를 지으셨다.    

 

‘내 딸’이란 말. 한 번도 쓰시지 않던 표현이다. 우리나라 정서에는 ‘우리 딸’이 더 자연스러운데, 아버지가 안 계시니 ‘내’라고 했을까. 엄마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것일까. 이유를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엄마와의 밀착감이 강하게 느껴져 ‘우리 딸’보다 좋았다. 


엄마가 건강하실 때 하나 있는 딸이 엄마 편을 들지 않는다고 푸념을 하실 정도로 나는 따박따박 따지기 좋아했던 딸이었으므로, 엄마 기억에 툭하면 입바른 소리 해서 서운했던 딸로 저장되어 있는 건 아닐까 걱정했었다. 그런데 “내 딸, 이쁘다” 하시니, 이쁜 딸, 살가운 딸로 생각하시는구나, 엄마가 다 품으셨구나, 싶어, 죄송스러운 마음과 감사가 한데 뒤엉켜 올라왔다. 


 설을 앞두고 “내 딸, 이쁘다” 하시던 게 자꾸 생각난다. 

 이제 엄마가 없는 설을 맞게 되는구나. 가슴에 뻥 구멍이 뚫려 바람이 휘휘 몰아치는 것 같아 엄마가 보내셨던 문자를, 틀린 철자로 이뤄진 문장을 하염없이 들여다본다.  


 엄마의 빈자리가 파문 일 듯이 번져간다.    

 슬픔과 자책 저 아래를 헤집어 보니, 그래도 3년 동안 엄마가 평안하셨으니 다행이라고 위안 삼으며, 간간이 엄마를 보살필 수 있었던 것이 감사하다는 심정이 뒤섞여 있다. 조금이나마 내 힘을 보탰다는 사실로 인한 안도라니, 자식이란 어쩔 수 없는 이기적인 존재인가, 한심할 뿐이다.                                


*** <문장> 2023 겨울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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