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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혜경 Jan 02. 2024

최선을 끌어내는 한 해

 <이처럼 사소한 것들>  - 사소한 것들이 합쳐진 엄청난 힘 

2024년 갑진년이 밝았다. 

모두들 새해를 맞아 행복한 시간을 누리기를, 그동안 이루지 못한 일들을 이루기를 희망하며 열심히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한다.

새해 둘째 날,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으며, 나에게 있는 가장 좋은 면과 가장 나쁜 면 중에서 좋은 면을 끌어내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한다.




클레어 키건은 1968년 아일랜드 위클로에서 태어났다. 24년간 작품 활동을 하면서 단 4권의 책을 펴냈다. 이를 두고 <<가디언>>은 "탄광 속의 다이아몬드처럼 희귀하고 진귀하다"라고 평했다. 그 작품들이 모두 얇고 예리하고 우수하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 <말없는 소녀>를 보고 너무 좋아서 원작인 <맡겨진 소녀>를 읽게 되면서 클레어 키건을 알게 되었다. <맡겨진 소녀>는 2009년에 발표되었는데, 그 해 데이비 번스 문학상을 수상했고, <<타임스>>에서 뽑은 '21세기 최고의 소설 50권'에 선정되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2021년 출간되었는데, 2022년 오웰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라 '아름답고 명료하며 실리적인 소설'이라는 심사위원들의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이 소설은 18세기부터 20세기말까지 아일랜드 정부의 협조하에 가톨릭 수녀원이 운영하며 불법적인 잔혹행위를 저질렀던 '막달레나 세탁소'를 배경으로 하여, 우연히 알게 된 사실 앞에서 고민하는 인물을 세심하게 묘사한다. 우리나라 형제복지원을 떠올리게도 하는데, 불행한 삶에 내던져진 이들을 외면하며 살아가는 우리 마음을 울리는 종소리처럼 다가왔다.     


소설은 한기가 칼날처럼 스며드는 겨울날씨를 묘사하며 시작한다.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 Barrow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이 도시에서 석탄과 토탄, 무연탄, 분탄, 장작을 파는 빌 펄롱이란 남자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는 빈주먹으로 태어났다. 그의 엄마는 열여섯 살 때 미시즈 윌슨의 집에서 가사 일꾼으로 일하던 중 임신을 했다. 미시즈 윌슨은 남편을 먼저 보내고 자식도 없는 이로서, 시내에서 몇 마일 떨어진 큰 집에 혼자 사는 개신교도였다. 펄롱 엄마가 곤란한 지경에 빠졌을 때, 가족들은 외면하고 등을 돌렸지만 미시즈 윌슨은 엄마를 해고하지 않고 계속 그 집에 지내며 일할 수 있게 해 줬다. 펄롱이 태어난 날, 아침에 엄마를 병원에 데려가고 또 둘을 함께 집으로 데려온 사람도 미시즈 윌슨이었다.


펄롱이 자라자 미시즈 윌슨은 펄롱을 돌보며 잔심부름도 시키고 글도 가르쳐준다. 펄롱은 학교에서 비웃음과 놀림을 당하기도 했지만 무사히 졸업하고 기술학교에 다니다가 석탄 야적장에서 일하게 된다. 

일머리가 있었고 사람들하고 잘 지내며 건실하고 믿음직했으며 일찍 일어나고 술을 즐기지 않아 그는 현재 자리로 올라온다.


그리하여 지금은 아내 아일린과 딸 다섯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가장의 삶을 누리고 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궁금하지만 (어머니가 갑자기 죽어 아버지가 누구인지 듣지 못한다) 과거에 머물지 않고 딸들을 부양하는 데 집중한다.     


시대 배경은 1985년으로, 곤궁한 사람들이 많아진 혼란스러운 시기이다. 실업수당을 받으려는 사람들 줄이 점점 길어지고 전기요금을 내지 못해 창고보다도 추운 집에서 지내며 외투를 입고 자는 사람도 있다. 시골로 가면 젖을 짜달라고 우는 젖소들이 있었는데, 그 까닭은 젖소를 돌보던 이들이 다 때려치우고 영국으로 떠나버린 탓이었다. 조선소가 문을 닫고 공장에서는 여러 차례 해고를 단행하고 문 닫는 회사가 늘어나 경기가 꽁꽁 얼어붙는다. 어린 남자아이가 고양이 밥그릇에 담긴 우유를 마시는 것이 목격되기도 한다. 


 이렇게 혹독한 시기에 펄롱은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딸들이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여학교인 세인트마거릿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도록 뒷바라지하겠다는 결심을 굳힌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시기, 시청 앞 트리에 불을 밝히는 점등식을 구경하고, 아내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만들고, 아이들은 산타에게 갖고 싶은 선물에 대해 편지를 쓰고, 그 편지를 읽으며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정하고.... 화목하고 단란한 가족의 풍경이다. 


그런데, 

펄롱은 뭔가 모를 결여를 느낀다.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펄롱은 장작과 석탄을 배달하러 수녀원에 간다. 

수녀원은 이 도시 모든 일에 관여하는 숨은 권력자이며 펄롱의 딸도 다니고 있는 세인트마거릿 학교도 운영한다. 그리고 직업 여학교도 운영하고 세탁소도 겸업했다. 이 학교와 세탁소는 타락한 여자들이 교화를 받는 중이라거나 가난한 집의 결혼 안 한 여자가 아기를 낳으면 보내지는 거라는 등의 소문들이 무성한 곳이다. 


약속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한 펄롱은 예기치 않게 그 소문의 진상을 목격하게 된다. 헐벗은 어린 여자아이들이 바닥을 닦고 있는 광경을 본 것이다.  신발을 신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한 아이는 눈에 흉측한 다래끼가 났고 또 다른 아이는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깎여 있었다. 그중 한 아이가 나오더니 펄롱에게 밖으로 나가게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그냥 물에 빠져 죽고 싶어요."라던 아이는 수녀가 나타나자 갑자기 바닥에 엎드려 윤을 내기 시작한다. 


수녀에게 여자아이들에 관해 묻고 싶었으나 머리에서 지우고, 펄롱은 수녀가 지불하는 돈을 받아 들고 나온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서 걸레질을 하던 아이들이 계속 생각나고, 그곳에서 현관으로 이어지는 문이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는 사실과 수녀원과 그 옆 세인트마거릿 학교 사이에 있는 높은 담벼락 꼭대기에 깨진 유리조각이 죽 박혀 있다는 사실도 놀랍게 다가온다.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그 얘기를 하자, 아내는 그런 일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고 답한다.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처럼 생각할 것이다. 나와 내 가족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면, 우리는 안전하다면, 다른 이들에게 일어나는 문제는 알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어지는 아일린의 말은 내 생각과 똑같아서 화끈거렸다. 

 

"이런 생각해봤자 무슨 소용이야?"

"생각할수록 울적해지기만 한다고."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척해야 하는 일들도 있는 거야. 그래야 계속 살지." 


펄롱은 자신의 아이가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만, 아일린은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못 박는다. 


크리스마스이브를 이틀 앞둔 이른 아침, 펄롱은 수녀원에 다시 간다. 석탄 광을 열자 그 안에 한 여자아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아이는 겁에 질려 있고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데다가 머리가 엉망으로 깎여 있다. 

 펄롱의 평범한 내면 한편에서 여기 오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 그냥 모른 척하고 집으로 가버리고 싶은 생각이 든다.   


펄롱이 도울 수 있는 일이 뭐냐고 물으며 아이의 이름을 물어보자 아이가 울음을 터뜨린다. "친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처음으로 혹은 오랜만에 친절을 마주했을 때 그러듯이."   


 수녀원을 다녀온 후 펄롱은 계속 괴롭다. 소녀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자신이 낳은 아기가 어디 있는지 물어봐 달라는 소녀의 부탁을(소녀는 미혼모인 셈이고 아기를 수녀들이 데리고 갔다는 것) 들어주지 않았고, 소녀를 수녀원에 그대로 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 괴로운 것이다. 


결국 펄롱은 수녀원을 다시 찾아간다. 석탄광에 여전히 그 소녀가 있었고, 펄롱은 소녀를 데리고 나온다. 소녀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는 것을 느낀다. 그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는 미시즈 윌슨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생각한다. 어떻게 자신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생각한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룬 것이다.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그의 어머니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앞으로 고생길이 펼쳐질지 모르나,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는 생각으로 걸어가는 펄롱에게서 환한 빛을 본다.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이 없는 한 해를 보내기를, 

최선을 끌어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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