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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혜경 Dec 08. 2023

겨울의 소설 (3)

황석영 [삼포 가는 길] 

황석영의 단편 [삼포 가는 길](1973)은 세 인물이 눈발 날리는 겨울길을 가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이다. 

소설의 첫 장면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영달은 어디로 갈 것인가 궁리해 보면서 잠깐 서 있었다. 새벽의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밝아오는 아침 햇빛 아래 헐벗은 들판이 드러났고, 곳곳에 얼어붙은 시냇물이나 웅덩이가 반사되어 빛을 냈다. 바람 소리가 먼데서부터 몰아쳐서 그가 서 있는 창공을 베면서 지나갔다.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수십여 그루씩 들판가에서 바람에 흔들렸다.      



‘어디로 갈 것인가’ 

궁리하고 있는 영달의 모습은 갈 곳이 정해져 있지 않은 ‘길 위의 삶’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거기에 겨울 새벽이라는 시간은 그의 처지를 보다 처연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공사판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영달은 현장 사무소가 문을 닫자 밥집에서 달아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가 겨울 새벽에 길 위에 있는 까닭은 청주댁과의 현장을 그 남편에게 들켰기 때문이다. 곧 급하게 도망 나온 상황인 것.     


그의 앞에 한 사내가 다가온다. 

그 역시 공사장에서 일하던 사람이다. 

 심사가 좋지 않았던 영달은 처음엔 반감이 있었지만, 가까이 얼굴을 맞대고 보니, 그리 흉악한 몰골도 아니어서 이야기를 나눈다. 


어디로 가냐는 영달의 물음에 사내는 '삼포'에 간다고 답한다. 

"내 고향이오."란 사내의 말로 두 사람의 처지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는 "으로 가는 중이었고, 영달이는 또 다른 곳으로 달아나는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행도 없이 길을 갈 일이 아득하여 영달은 사내의 뒤를 따라간다. 도중에 국밥을 먹으러 들어갔던 주점에서 일하던 여자가 도망을 쳤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주인여자는 도망간 여자를 잡아오면 보상하겠다고 제안을 한다.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고 곧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린다.

탐스러운 눈송이는 포근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근심걱정이 없어지는 느낌도 주지만, 길가기를 어렵게 한다. 새끼줄로 감발치고 계속 길을 가던 두 사람은 주점에서 도망간 여자 백화를 발견한다. 

백화는 처음엔 영달에게 반감을 품었으나 이들의 여정에 합류한다.       


그리하여 처음 등장한 영달에 정 씨라는 사내가 더해지고 백화까지 세 사람이 함께 감천 기차역까지 가는 여정이 펼쳐진다.




이들이 걷는 길은 이들이 처해있는 현실의 축약이라고 할 수 있다. 

곧 바람 불고 눈보라 치는 몇십 리 길을 돈을 아끼느라 걸어가고 있으며, 허기가 지고 떨려도 따뜻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잠시 폐가에 들어가 잔가지를 모아 불을 지피고 몸을 녹이는 짧은 시간이 허용될 뿐이다.     



불을 지피자 오랫동안 말라 있던 나무가 노란 불꽃으로 타올랐다. 불길과 연기가 차츰 커졌다. 정 씨마저도 불가로 다가앉아 젖은 신과 바짓가랑이를 불길 위에 갖다 대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불이 생기니까 세 사람 모두가 먼 곳에서 지금 막 집에 도착한 느낌이 들었고, 잠이 왔다. 영달이가 긴 나무를 무릎으로 꺾어 불 위에 얹고, 눈물을 흘려가며 입김을 불어 대는 모양을 백화는 이윽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 장면은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따뜻한 공간으로, 모닥불로 인한 열기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교감이 이루어지는 지점이다. 서로 반감을 갖고 있던 영달과 백화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는 것이다. 그러나 어둡기 전에 일어나야 하는 처지이므로 따뜻함을 오래 만끽할 수 없다. ‘먼 곳에서 지금 막 집에 도착한 느낌’이 들지만 이곳은 진짜 집이 아니라 가짜 집이므로 다시 찬바람 부는 길로 나서야 하는 것이다.


‘말뚝’을 박고 정착하고 싶지만 ‘능력’이 없어 떠도는 영달, ‘재봉실이 나들나들하게 닳아’ 빠진 속치마처럼 겨우 스물두 살이지만 일찍 늙어 버린 백화는 고향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신세이다. 셋 중 유일하게 귀향길에 오른 정 씨는 고향이 변했다는 소식에 망연자실해진다. 뜨내기 생활을 청산하고 따뜻한 집과 고향에서 살고 싶은 이들의 소망은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다.


작품의 후반부에서 정 씨는 고향 섬이 이제 육지가 되고 공사판으로 변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정 씨가 기억하는 삼포는 더 이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한 열 집 살까? 정말 아름다운 섬이오. 비옥한 땅은 남아 돌아가구, 고기두 얼마든지 잡을 수 있구 말이지.” 


이와 같이 정 씨 머릿속에 각인된 삼포의 이미지는 유토피아와도 같다. 

그 고향은 이제 육지가 되었다. "바다에 방둑을 쌓아놓구, 추럭이 수십 대씩 돌을 실어 나른다구." "복잡하기가 말할 수 없"는 곳이 되어,  ‘변고’가 일어나고 ‘하늘’을 잊어가고 있다.


마지막 문장을 “기차가 눈발이 날리는 어두운 들판을 향해 달려갔다.”로 맺으며 작가는 이들의 삶이 앞으로도 겨울의 추위를 벗어나기 어려우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제목 ‘삼포 가는 길’이 내포하는 것처럼 이들은 고향이 아니라 고향 ‘가는 길’ 위에 있다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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