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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혜경 Jan 15. 2024

"엉? 어, 어..."의 말하기

친구를 추억하며 


사십 년도 더 지난 장면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와서는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본다. 

강촌에서 강을 바라보고 있는 나와 친구들.      


읽던 소설에 강촌 여행이 나와서였다. 


삼십 년 전, 한 친구의 스물일곱 번째 생일모임을 의논하다가 불현듯 강촌 여행을 결정한 네 명의 친구들의 이야기이다. 불확실하지만 꿈이 있었고 서로 걱정해 주고 챙기던 이들은 이후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물살에 속수무책으로 떠밀려 온다. 

한 명은 자살하고 두 명은 원수가 되는 등,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 채” 삼십 년 전의 여행을 “오로지 즐거웠던 추억으로만 채색하려 애써 왔”던 것을 뒤늦게 깨닫는 화자의 모습은 우리 삶에 존재하는 ‘불가해한 구멍’에 대한 ‘무지와 무력감’을 처절하게 인식하게 했다. 


나의 강촌 여행도 세 명의 친구들과 함께였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이 이 세상에 없고 또 다른 한 명과는 연락이 끊겼으므로, ‘불가해한 구멍’까지는 아니더라도 젊은 날 예감하지 못했던 결락을 나 역시 피해 가지 못한 셈이다.  


대학 4학년, 모든 대학에 휴교령이 떨어졌던 때. 광주에서 일어난 일이 명확히 무엇인지 모른 채, 흉흉한 유언비어가 떠돌던 시절이었다. 정부는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자는 벌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는데, 사실은 모두 맞는 말이래, 쉬쉬하면서, 그 내용이 하도 끔찍해서 진짜 유언비어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보내던 어느 날, 학교 정문이 굳게 닫힌 채 계엄군이 그 앞을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다가 여행이라도 가자고 강촌으로 떠났던 것이다. 


 방에서 사슴벌레가 나온 소설과 달리, 우리가 묵었던 방은 평범했다. 그래서 방에 대한 기억은 딱히 없고 대신 반짝이던 강의 기억이 선명하다. 잔인하고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현실은 나 알 바 아니라는 듯 고요하면서도 표표히 흐르고 있던 강. 아침 맑은 햇살을 받아 빛나는 윤슬이 눈물 나게 아름다운데. 이 와중에 아름답다는 느낌이 든다는 게 부조리해서 복잡했던 심경도.





 그리고 같이 강을 바라보면서 시국에 대해 흥분하던 경이 있었다.


경을 처음 본 날, 세속적인 일에 관심 없는 듯한 태도에 매료당했다.  

대학 1학년 때 수랑 다방에서 놀고 있는데, 경이 수를 보고 반가워하며 우리 자리로 왔다. 둘이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것. 나와도 간단 인사를 하고 바로 오래된 친구처럼 수다를 떨었는데, 경은 당시 이슈에 대해 거침없이 얘기했다. 

똑똑한 친구라는 느낌이 확 들었다. 다소 산만한 행동도 일상과 거리 먼 문학 속 인물처럼 보여 근사했다. 수의 말이 그런 인상을 더 강화시켰다. “지난번 서클에서 발표하는 걸 들었는데, 너무 말 잘하고 똑똑하더라.” 


그날 이후 또 다른 친구 영과 함께 우리 네 명은 대부분의 수업을 같이 들으며 단짝 친구로 지냈다.  


그런데, 처음엔 신선하게 다가왔던 경의 무심함이 거의 매일 보며 자질구레한 일상을 나누는 사이가 되고 보니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커피잔을 건드려 커피를 흘린다거나 약속을 까먹고 늦게 오고, 같이 하기로 한 과제를 잊어버리고, 눈화장 한 것을 잊고 비벼대서 눈 주변이 지저분해지고... 

사실 애교로 봐줄 수도 있는 일들인데, 반복되다 보니 우리의 대응이 짜증 섞인 것으로 변해갔다. 열을 내서 현실을 비판하는 모습도 소소한 실수들에 묻혀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넌 맨날 왜 그래? 좀 차분해질 때도 됐잖아.” 

우리 중 가장 깔끔한 영이 참다못해 한마디 하면 경은 “엉? 어, 어...”하며 쑥스럽다는 듯 웃곤 했다. 

어색하거나 계면쩍을 때 경은 “엉?”하고 한번 말끝을 올려 반문하듯이 말하고는, 곧이어 “아, 그렇구나” 하듯이 “어, 어...”하는 말을 습관적으로 덧붙이곤 했다.


졸업 후 각자의 길을 가다 보니 만나는 횟수가 점차 줄었고, 경은 취업 면접장에서 알게 된 남자와 결혼했다. 우리 중 가장 먼저였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경의 첫 아이가 세 살쯤 되었을 때 수의 집에서, 더 시간이 흘러서 경의 둘째가 서너 살 되었을 때 경의 집에서 만났다. 매번 아이가 어찌나 떼를 쓰는지, 밀린 이야기를 나누지 못할 정도였다. 투정 부리는 아이들에게도 경은 “엉? 어, 어...” 하면서 달래고 있었다. 


언젠가 전화 통화 중 경이 왈칵 화를 내고 끊어버린 적이 있었고, 수화기 너머로 딸애가 성질부리는 소리가 들려 온전히 대화를 이어 나가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경의 삶이 불안해 보여 다른 친구들과 의논하곤 했지만, 그때뿐, 내 삶이 바빠서 곧 잊어버렸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란 뒤엔 학원 강의를 나가며 편안해진 것 같았는데, 어느 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 버렸다. 암에 걸린 사실을 뒤늦게 알아 가보지도 못했는데...


쉰을 막 넘긴 나이였다. 

나중에 듣기를, 암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끝까지 해맑았다고. 

아마 알았더라도 “엉? 어, 어...” 하며 놀랍고 억울하지만 한편으로 납득된다는 표정을 짓지 않았을까.


“엉? 어, 어...”는 나도 문제를 알겠는데 어쩔 수 없어, 노력은 하는데 좋아지지 않네, 해결할 방도를 모르겠어, 하는 뜻 아니었을까. 

드문드문 실수는 하지만 나름 최선을 다하는데, 의도와 달리 구멍이 생기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 하는 마음을 복합적으로 드러내는.


나 또한 수시로 겪는 당혹감이라서 경의 그 말이 더 답답했던 걸까. 생각해 보니 경은 우리에게 “너희는 뭐가 그리 불만이니?” 따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런저런 옛 생각으로 잠 안 오는 밤, 경의 말버릇을 떠올린다. 

멋쩍어하는 특유의 웃음과 함께.  


틈이 좀 있다고 탐탁지 않아 했던 내 이기심, 경의 삶을 진심으로 이해하려 한 적은 없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받아들이는 밤이다. 너무 늦었지만 용서를 구하며 경의 안식을 빌어본다.    

 

      <<인간과 문학>> 2023 겨울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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