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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혜경 Jan 24. 2024

내 안의 아이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화내면 어떡해?” 

 “직원이 화낼까 봐 두려워 말을 하지 못하겠어요.”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멈칫, 멈췄다. 

한 여자아이가 가녀린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요즘 유명한 오은영 박사가 아이들의 문제행동을 상담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각양각색의 아이들 모습을 주시하면서 부모와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의 속마음도 들어본다. 그 과정에서 부모의 과거가 딸려 나오고 사회의 문제가 들춰지기도 해서, 생각거리가 많아지는 프로그램이다. 

 

 이번 주인공은 중 1 여자아이인데 겁이 많아 엄마가 늘 따라다녀야 하는 아이이다. 

시지각능력도 부족해서 찾기 쉽게 걸어놓은 교복을 찾지 못해 출근한 엄마에게 전화하고, 책상 위도 정리하지 못해 어지럽기 그지없다. 

버스 기사에게 “청소년 1장”이란 말을 하지 못하고, 카페에서 음료수를 주문하지도 못하는데, 이유는 기사나 직원이 화낼 것이 겁나서이다.


소심했던 내 어릴 때가 떠올라 계속 지켜보는데, 패널로 나온 두 연예인이 흥미로운 고백을 했다. 

과장된 몸짓과 수다스러운 캐릭터로 알려진 이들인데, 둘 다 어린 시절 소심했다는 뜻밖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한 명은 화장실 가고 싶다는 말을 못 해 그만 실례해 버린 적이 있고, 다른 한 명은 버스에서 내릴 때 혼자 내리면 사람들 시선을 받는 게 두려워 내릴 곳이 아닌데도 여러 사람들이 하차할 때 내렸다는 것이었다. 


나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방향을 잃고 헤매던 순간이 있었다. 담임선생님의 심부름으로 교무실에 가서 무슨 서류를 받아와야 하는데, 교무실을 찾지 못해 애가 타던. 


나 역시 좀 어리바리한 데다 말 걸기를 주저하던 아이였으므로, 선생님께 위치를 제대로 물어보지 못했던 탓이다. 교실을 나오긴 했지만 교무실 위치를 짐작할 수 없어서 막막하던 그때 심정은 주변이 온통 희뿌윰하던 장면으로 뇌리에 저장되어 있다. 

심부름 간 애가 오지 않으니까 선생님이 다시 남자애를 보냈고, 그 애 덕에 무사히 교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너 여기서 뭐 하고 있냐는 그 애 말에 창피하면서도 안도했던 심정이 지금도 꽤 생생하게 떠오른다. 


어린 맘에도 그런 모습은 바보 같아 보여서, 이후 변화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작가 수전 케인의 [콰이어트]를 보면 외향성을 롤모델로 강요하는 사회분위기에 대해 지적하고 있는데, 어렴풋이나마 나도 그런 분위기를 감지했던 거 아닐까 싶다. 


노력 덕에 학년이 올라갈수록 조금씩 활달해졌고, 중2에 와서는 가벼운 일탈을 시도할 정도로 발전(?)했다. 

착실한 모범생은 매력 없다는 생각이 확고해져서, 이른바 노는 아이들과도 허물없이 지내고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을 열심히 들으며 팝송을 외우곤 했다. 

쉬는 시간에 도시락을 까먹고 수업 시간에 몰래 소설책을 돌려보는 짜릿함을 느끼고, 고등학교에 와선 써야 하는 교복 모자를 안 쓰고 신으면 안 되는 운동화를 신는 등, 크게 벌 받지 않는 선에서 규율 위반을 재미 삼았다.  



나혜영 교수 작품 




결혼 후에는 아이 키우며 바삐 살다 보니, 내 모습을 고민할 새도 없이 시간이 흘렀고, 얌전함과는 거리가 먼 아줌마가 되어 있는 것을 어느 날 문득, 발견하게 되었다. 

이젠 아줌마를 넘어 어르신 대열에 들어와 보니, 예전 같으면 심장 뛰고 놀랄 일에 무덤덤하게 넘어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렇지만 여전히, 말 걸기 어려워 머뭇거리고 낯 가리던 아이가 내 안에 남아있음을 느낄 때가 있다. 

잘 모르는 사람이나 관공서 등에 문의하는 전화는 지금도 긴장되고, 지나치게 말이 많고 이질적인 사람들과 섞이는 건 여전히 싫다. 

왁자한 분위기에서 도망가고 싶을 때, 혼자만의 시간이 간절할 때, 그 아이는 내 안에서 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온 세상이 희뿌옇던 그때 내 심정 같을 상황에 마음이 쓰이게 한다. 

문학작품에 무수히 등장하는 내성적인 인물을 현실에서 마주쳤을 때 한 번 더 돌아보게 되고, 번쩍이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쪽보다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쪽에 마음이 기우는 것도 내 안의 아이 덕분인 듯하다.  


수업 중에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발표도 잘하고 활달하게 인사도 잘하는 학생이 맘에 드는 한편으로, 교실 한구석에서 외따로 떨어져 혼자 앉아있는 학생이나 발표하라고 호명하면 작은 목소리로 가만가만 말하는 학생에게 눈길이 가는 것도, 

화려한 커리어로 빛나는 이들보다 실패의 아픔을 끌어안은 이, 자기 몫을 주장하지 못하고 쭈뼛거리는 이, 할 말은 많아도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이들에게 힘을 보태고 싶은 까닭도......


한때 벗어나려 했던 그 아이가 있어서 다른 사람 고통에 무감하거나 오만해질 수 있는 여지가 조금이라도 줄어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이제 비로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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