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날이다.
얼마 만에 잡은 개인적인 약속인지 모르겠다.
35년 정도 된 국민학교 친구들이다.
약속 시간에 맞춰 준비를 하고 나가려는데,
딸이 한소리하며 화를 낸다.
“왜 내 허락도 없이 나가는 거야?”
나는 웃으며 말했다.
“미리 이야기하면 보내줄 거야?”
“아니, 안 되지!”
나는 웃으며 받아쳤다.
“여자친구가 따로 없네.”
어르고 달랜 뒤에야 집을 나섰다.
약속 장소에는 늦지 않게 도착했다.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가 시작됐다.
늘 듣는 질문이 나온다.
“너, 요즘 뭐 하고 사냐?”
“뭐, 매일 똑같지. 일하고 집에 오고”
내 손을 보며 친구가 말했다.
“넌 관리 안 하냐?”
내 손은 트고 갈라져 엉망이었다.
“일하면서 설거지 많이 하고, 물도 많이 만지니까 어쩔 수 없지.”
“약 좀 바르고 다녀라.”
“귀찮게 뭘.”
그러자 친구가 툭 던지듯 말했다.
“너는 왜 너 자신을 안 아끼냐?”
순간 할 말이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웃고 넘겼을 말인데,
그날은 그러질 못했다.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요즘 장사는 좀 어떠냐?" 친구의 물음에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뗐다.
"솔직히… 너무 힘들어. 그냥 힘든 게 아니라,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야."
내 이야기에 친구는 말없이 소주잔을 채워줬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게 걱정부터 시작돼. 그때마다 머리가 조여 오고, 걷다가도 멈춰 서게 돼. 출근길이 그냥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 너무 고통스러워."
잠시 숨을 고른 뒤, 나는 덧붙였다.
"아이한테 별 이유 없이 화를 내고 나서야 알았어. 아, 나 지금 미쳤구나, 제정신이 아니네..."
나는 내 이야기를 두서없이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가 물었다.
“병원 가봤냐? 애 엄마는 알아?”
“아니, 안 갔어. 얼굴 보고는 못하고 카톡으로 얘기했지. 집이랑 가게만 반복하는 일상이고, 장사도 잘 안 되니, 우울증이 언제 와도 이상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대.”
“그래 말해야 해. 그리고 병원 꼭 가라.”
“간다고 달라질까? 가게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의미 없을 것 같아.”
“가봐. 확실히 좋아질 거야.”
그 친구는 이미 우울증 약을 먹고 있었다. 그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래서인지 그날 친구의 말들이 더 오래 남았다.
“힘들면 자주 만나서 이야기해.”
“뭘 만나, 우울한 이야기만 할 텐데. 전염돼. 기운만 뺏기고 같이 지칠 거야.”
“뭔 소리야? 왜 남을 신경 써?”
그렇게 욕을 먹었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편안했다.
아마 나는, 누군가에게 한 번쯤은 그렇게 혼나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결국 병원을 가지 않았다. “예약하고 대기해야 한다”는 말에, 어쩌면 가지 않을 핑계를 찾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각자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가고 있구나. 나만 이 길 위에서 홀로 헤매고 있는 건 아니었구나.'
그 사실을 깨달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내가 겪는 고통이 유난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저 삶의 과정 중 하나라는 걸 받아들이자 마음의 소란이 조금은 잦아들었다.
지금은 우울이 잠잠하다. 마치 잠복기처럼.
스멀스멀 올라올 때도 있지만, 어떻게든 붙잡고 버티고 있다.
오래간만에 친구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연락도 자주 하지 않고, 잘 나오지도 않는 나를
여전히 친구로 대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고맙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 있어도 괜찮은 자리.
그것만으로도
나는 꽤 잘 살고 있는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