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한 별이 쏟아지다

올콧 조그마한 별장에서 영감을 옮기다

by 나디아


2023.04.07


미국에 와서 좋은 점은 하늘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고도가 높고 건물이 낮아 끝없이 펼쳐지는 하늘이 더 크게 다가온다.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구름의 미세한 움직임을 나의 두 눈이 포착한다. 무수한 별이 수놓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당장이라도 빨려갈 듯해서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하늘의 에너지를 껴안는다. 고흐가 왜 밤하늘을 사랑했는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밤은 그 모든 것으로 충만하다. 빛깔도 없고, 불 켜진 창문 하나 보이지 않지만, 사물은 좀 더 육중하게 존재하며, 밤은 대낮에는 드러나지 않은 것을 암암리에 내비친다.
<댈러웨이 부인> 최애리 역.


어제는 빛나는 별이 유독 크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반짝이는 별을 보며 누군가는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고, 또 어떤 이는 다음 발걸음을 옮긴다. 어젯밤 내가 본 밤하늘은 섬광처럼 잠깐 반짝이고 사라질 운명은 아니었다.


"저기 빛나는 세 개의 점이 보여?"

나란히 일렬로 촘촘히 박혀있는 별 세 개가 눈에 띄었다. 오리온자리였다.


가만히 별을 보고 있자니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어릴 적 혼자 자는 게 무서워 이불을 온몸으로 돌돌 말고 머리 위까지 덮을 때면 이불 안으로 새어 나오는 작은 빛이 인사를 건넸다. 바로 천장 위에 손수 붙인 야광 별자리 스티커가 쏟아내는 빛이었다.


‘저건 별모양이네. 이건 무지개 모양이야.’

하나하나 별을 셀 즈음에 두려움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졌다. 나만의 밤하늘을 품었던 그때가 생각나는 밤이었다.


‘Meaning-making being(의미를 만드는 존재)’라는 영어 표현이 있다. 인간은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한다. 눈에 보이지만 형언할 수 없는 것으로 존재한 무언가를 새로운 의미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은 인간만이 할 수 있다. 그러니 윤동주 시인이 별 하나에 추억과 사랑 그리고 시를 떠올린 것도 당연해 보인다. 작가는 독자 마음속 형체 없는 무언가로 자리했던 별을 꺼내어 밝혀준다.


영국의 소설가 D.H. 로렌스는 자신의 에세이 <Why the novel matters(소설이 왜 중요한가)>에서 소설을 읽는 것을 카멜레온에 비유한다.

서로의 떨림은 살아있는 또 다른 이에게 닿아 그에게 들어오면 그의 삶은 마치 카멜레온이 갈색 바위에서 초록색 잎으로 기어가듯 새로운 색을 입게 된다.
<Why the Novel Matters> D.H. Lawrence. 글쓴이 옮김.


작가에게 있어서 별은 영감이고, 독자에게는 내면세계로 들어갈 창구인 것이다. 영감을 글로 옮겨 독자의 마음속 별을 발견해 주는 작가의 역할은 무겁다. 미국 작가 나사니엘 호손은 <The Devil in Manuscript(원고 속 악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때때로 내 생각들은 땅 아래에 묻힌 귀중한 돌과 같다. 그것들을 파내려면 땀을 흘려야 하고, 흙을 닦아내어 빛나게 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그래야만 생각의 물줄기가 한 번에 뿜어져 나와 한 페이지를 적신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에서 물이 샘솟듯이!
<The Devil in Manuscript> Nathaniel Hawthorne. 글쓴이 옮김.

실제로 호손은 작가의 영향력을 'wizard power (마법사의 힘)'으로 표현한다. 글이 한 사람에게 닿아 어떤 결과를 파생시킬 질 알 수 없다는 건 그만큼 대단하면서도 무서운 일이다. 작가가 위대한 이유는 그런 무거운 압박 속에서도 끊임없이 세상에 없던 이야기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흔히 작가가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일을 아이를 낳는 것에 비유한다. 둘은 존재하지 않던 것(혹은 무형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에 생명력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유한한 인간이 낳은 산물이 생명을 이어간다는 점에서 또한 비슷하다.

그는 자신의 글을 읽고 다양한 감정을 느끼길 바라면서도 자신의 어두운 감정으로 인해 독자의 순수한 마음이 변질될까 두려워한 사람이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수용자를 완전히 배제하긴 어렵다. 내 글이 어떻게 읽힐지 고려할 수밖에 없다. 어떠한 제약 없이 내 생각을 풀어내고 싶으면서도 글의 위력을 알아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다. 보이지 않는 경계에서 작가는 끈질기게 고요하고도 외로운 싸움을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들로 잠을 설치고 있을 즈음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와의 대화는 요란했던 내 밤하늘을 진정시켜 주었다.


"나는 요즘 흩어지는 생각들이 무서워. 가끔 내 입이 머리를 못 따라가는 듯한 느낌을 받아. 난 100 퍼센트 정화된 물을 머릿속에서 쏟아내는데 입을 통해서 나오는 동안 모래와 자갈이 뒤섞여 내 이야기를 망치는 기분이야. 매번 80 퍼센트의 정수밖에 못 담아내는 거 같아서 두려워."


적절한 수식어를 채 떠올리기도 전에 정제되지 않은 말로 쏟아낸 내 이야기를 그는 한참 들었다. 어떤 반응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나와는 다른 시각을 가진 그의 대답이 궁금하긴 했다. 그렇게 한참을 들은 후 처음 그가 건넨 말은 뜻밖이었다.


"너의 말과 글이 100퍼센트 일지 80퍼센트 일지 어떻게 알아? 사람은 다 다르다며.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게 다르니까 80퍼센트만 담아냈다고 생각한 너의 글이 누군가에게는 100퍼센트로 와닿을 수 있는 거 아닐까? 그리고 애초에 글에 퍼센트를 부여하는 건 맞지 않아."


뾰족한 나는 가끔 상대의 위로를 비틀어서 받아들인다. 어젯밤 그가 내게 건넨 말은 '위로의 설득'이었다. 나를 향한 위로를 내가 받지 않으니 그는 계속해서 나를 설득했던 것이다. 모가 난 나를 보듬어서 둥글게 만들어준 일을 한 것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무수히 많은 말을 만나게 된다. 사람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수많은 말과 마주친다. 어떤 말은 아무 영향가 없이 스쳐 지나가고 또 어떤 말은 깊게 남아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한다. 누군가 쏟아낸 말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에너지를 가득 담고 있는 또 다른 말은 나를 안아 포근함을 느끼기도 한다. 말의 파장력은 얼마나 대단한가.


그가 건넨 위로의 설득이 아니었으면 내 별은 정처 없이 떠돌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수 있다.

위로->부정->설득->수용, 이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며 밤새 긴긴 대화가 오갔다. 통화를 끊고 눈을 뜬 아침 일어나자마자 난 메모장을 열었다. 어젯밤 그와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한 자 한 자 글로 옮겨 적기 시작했다. 굴러가던 빛이 한순간에 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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