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에 대한 고찰

by 여운

나는 누군가를 잘 믿지 못한다.

어렸을 적에는 너무 잘 믿는 게 탈이었다.

그래서 모르는 아저씨께 길을 알려준다고 따라나섰다가

어머니께 혼난 적도 있었고

중고 거래로 사기를 당하고는 오지 않는

우편을 한참 기다리기도 했었다.

(결국 경찰서에 가서 잘 해결했다.)


이러한 데이터들이 쌓여서 그런지

요즘엔 누군가를 믿는 게 쉽지 않다.

연애에서 특히 이런 게 티가 난다.

온 마음을 다해 믿고 싶은 상대에게도

불신의 향이 자꾸만 피어올라서,

마음을 여는 데 몇 달은 걸린다.




성인애착유형테스트를 하면 나는 공포회피형이 나온다.

자기부정 타인부정이라는 말 뜻이 처음엔 뭔지 잘 몰랐는데

말 그대로이다. 나도 부정하고 다른 사람도 부정한다.

나는 물론 타인도 믿지 못한다는 뜻이다.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

내가 지금 한 선택이 최선일까?

끝없는 나에 대한 의심은 결국 날 믿지 못하는 결과로 만들었다.


타인에게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그렇게 말해도 언젠가 날 떠날거잖아.

나를 정말 사랑하는 게 맞아?

끊임없이 상대의 마음을 의심했다.


그럼 대부분의 사람은 처음에는

귀엽다는 듯이 웃고, 나에게 맞춰주려고 부단히 애를 쓴다.

마음이 조금 놓였다가 며칠 뒤에 난 또 상대를 시험한다.


이래도 네가 날 계속 좋아할까?

날 계속 사랑할 수 있겠어?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들으면 지치기 마련이다.

상대는 이제 그만 좀 해, 라며 짜증을 내거나

한숨을 푹 쉰다.


난 생각한다.

거 봐, 지금까지 다 거짓말이었잖아.




그러던 내가 자기긍정 타인긍정의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나 사랑해? 응 사랑해.

얼마만큼? 엄청엄청 많이.


표현력은 조금 부족한 사람이었다.

하늘만큼이라거나, 온 우주만큼이라거나

낯간지러운 은유같은 건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내가 저 질문을 할 때마다 한결같이

똑같은 말투와 표정으로 똑같은 답을 했다.


내가 이 질문 500번 하면 어떡할거야?

500번 대답해야지.

단순하고도 무쇠같은 대답이 좋았다.


여운아, 사람을 조금 더 믿어도 돼.

누군가의 행동이 사실은 이랬을거다-라고

습관처럼 의심하는 나를 보며

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었다.


그 때 처음으로 믿음에 대한 고찰을 하게 되었다.

아, 나 누군가를 잘 못 믿는 성격이구나.

그래서 종교도 따로 없는 거였지.


큰 깨달음을 얻긴 했는데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건 어렵지 않은가.

우선 가까운 사람인 나부터 믿어보기로 했다.




이제 나는 나를 크게 불신하지 않고

선택에도 크게 고민하지 않으려한다.

이게 베스트 메뉴인데 제일 맛있겠지.

좀 사이즈는 크지만 몇 번 빨면 줄겠지.


이렇게 살면 마음이 조금은 더

편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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