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벗과 삶과 글

by 여운

어렸을 때부터 글을 잘 쓴다는 말을 곧잘 들어왔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에서 하는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못 받은 적이 없었고 시, 도에서 열리는 백일장에 종종 이름이 올랐던 기억이 있다. 나에게 글은 자랑이자, 재능이었다. 어릴 땐 그게 참 좋았다. 잘하는 것을 빠르게 알게 되어 꿈을 빨리 찾을 수 있었고, 원하던 대학교의 문예학부에도 합격했다. 그렇게 난 체리필터의 노래 가사처럼, 내가 요절할 천재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인생은 변수들이 너무 많다. 나는 내가 글을 삶의 끝까지 좋아할 줄 알았으나, 입학하자마자 그 예상은 단숨에 비껴갔다.


글 쓰는 게 싫어진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눅이 들었다. 나의 모교는 현역뿐만 아니라 3,40대까지 연령대가 다양했다. 비단 나이의 문제는 아니었지만 내 글은 잘 쓰는 축에 끼지 못했다. 합평 시간이 다가오면 교수님께서는 졸작의 예시로 내 글을 스크린에 크게 띄웠고 신랄하게 질타를 이어가셨다. 그 글이 내 것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으나, 얼굴은 붉어질 대로 붉어졌고 결국 나는 첫 학기 강의에서 C+라는 성적을 받았다.


교수님과의 상성이 맞지 않았던 건지 내가 성장한 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C+였다. 그 후로는 무난한 성적을 받았고 이따금씩 A+를 받기도 했다. 어쨌든 내가 글 쓰는 게 싫어졌다는 사실은 그때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그저 적당한 성적을 받기 위해 비슷하고 엉성한 글을 써내고 있을 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난 좀 더 가시(可視)적인 재능을 원했던 것 같다. 그림을 잘 그린다던지 피아노를 잘 친다던지 농구를 잘한다던지. 무언가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잘한다'라는 생각이 드는 게, 나한텐 그게 재능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글은 딱 봤을 때 보이지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무나 쓸 수 있잖아. 그냥 자기가 하는 생각을 문자로 옮기면 그게 글이니까. 자존감이 바닥인 나에게 글은 다소 보잘것없는 능력이었다.


졸업하고 몇 달간 글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취업은 해야 하고,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내게 남은 건 ‘글’ 하나였다. 일단은 글로 밥벌이를 하겠다며 방송계에 처음 발을 내디뎠다. 커다란 방송국에 들어섰을 때, 사회초년생이 가진 약간의 긴장감과 미지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그러나 막내작가는 글을 쓰기보다는 메인작가가 필요로 하는 자료 조사, 프리뷰와 같은 업무를 주로 한다는 것을 간과하고 말았다.


그 괴리감을 못 이긴 어느 저녁, 사무실 비상계단에 쪼그려 앉았다. 눈물이 뚝뚝 떨어져 빳빳한 셔츠를 적셨다. 혹여나 끅끅거리는 소리가 계단을 타고 울릴까 입을 틀어막은 채 숨죽였다. 이게 네가 원하던 작가야? 속으로 몇 번이고 물었다. 분명 사람들은 날 작가님이라고 부르는데, 난 내가 작가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이 시기만 버티면 된다고 하지만 난 나의 글을 쓰고 싶었다.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지는 못할 것 같다. 한 달 만에 퇴사하고 방황했다. 여러 일에 발을 담갔다가 빼기도 하며,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 있으면 메모장을 열어 글을 남겼다. 하루는 그날의 일을 마구 쏟아내다가 '어라, 나 또 글 쓰고 있네.'라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오래된 친구처럼 넌 역시 항상 내 옆에 있구나. 돌고 돌아 글로 돌아왔다.




그렇게 펜을 오랜만에 들게 한 것이 브런치스토리 덕분이었다. 이곳에서는 누구든 글을 쓸 수 있다. 그리고 누구도 내 글을 두고 평가하지 않는다. 그게 부담을 많이 덜어주었다.


요즘엔 글 쓰는 것이 다시 재미있어졌다. 언제 또 싫어질지 모르겠지만, 글과 나의 관계는 이렇게 평생을 조금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졌다가를 반복할 것 같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든다.


지금은 브런치를 통해 꾸준히 글을 쓰는 게 나의 꿈이다. 꿈을 명사로 정의하지 않고 '꾸준히 글 쓰기'라는 동사로 만들려고 한다. 우선은 메모장에 묵혀둔 수천 개의 생각의 가지들을 쓸 것이다. 그리고 설령 타인이 인정하지 않아도 스스로 나를 작가라고 부르기로 했다.


내 오랜 꿈이자, 벗이자, 삶인 글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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