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도서관

by 여운

나에게 전철은 달리는 도서관이다.


제법 차가워진 아침공기를 맞으며

오늘도 집을 나선다.


운 좋게 앉게된 자리에서

눈을 붙일까 잠시 고민하다가

가방 한 켠에 자리잡은 작은 책을 꺼낸다.


자기계발서, 에세이, 시집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날마다 바뀌며

무료한 출근길에 조금이나마 즐거움을 준다.


며칠 전에 읽은 책에서 인상 깊었던 문구를 사진 찍기도 하고

꾸벅꾸벅 졸다가 봤던 부분을 수십번을 더 읽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샌가 내려야할 역에 도착한다.




어느덧 퇴근시간,

출근길과 퇴근길에 도서관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출근할 때는 주로 앉아서 책을 볼 수 있지만

(아마 내가 종점 근처에서 타서 그럴 것이다.)

퇴근할 때는 사람이 꽉 차서 서서 책을 보며 간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시간은 대개 이촌역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두운 터널을 빠르게 지나, 책 위로 햇살이 비춘다.

옆 사람이며 뒷사람이며 다들 고개를 들어 잠시 한강을 멍하니 바라본다.


동작대교 위에서, 일제히 고개를 들어

다들 물멍하는 모습이 조금 귀엽다고 느껴진다.

00멍이라는 단어가 생긴 것도 어쩌면 정신없이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잠시나마 아무 생각 없어지고 싶은 사람들이 만든 것 아닐까.


열차가 다시 역으로 진입하자,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다시 휴대폰으로 고갤 떨구고

어떤 이는 눈을 감는다.


나는 노을을 보며 떠오른 상념을 지워내고

다시 책에 몰두하려 한다. 어디까지 읽었더라.

한 문장을 읽자 끊겼던 필름이 이어붙여지는 것처럼

책의 내용이 다시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지금 이곳

달리는 도서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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