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양조씨. 내겐 風 바람풍 아빠.
아빠는 한평생 엄마와 나를 힘들게 한 원수 같은 사람이었다. “증오에서 사랑의 끝까지..” 온갖 감정을 경험한 아빠와의 시간들을 용기내어 끄집어본다.
아빠는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할머니에게 무한한 사랑을 받으며, 독립성과는 먼 철없는 아들로 성장했다. 자유롭고 예술적, 특히 음악적 감각이 뛰어난 소년이었다. 아빠가 4-5살 일 때 할머니는 여인숙을 운영하셨다. 목청 좋은 꼬마는 평소 노래하기 좋아했는데, 어느 날 손님이 조용히 하라고 윽박지르는 탓에, 심한 충격을 받고 어버버 말문이 막혀버렸다. 남자는 당당함과 자존심이 무기인데, 위축되고 자신감 없는 채 삶을 살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밴드부에서, 성인이 되어서는 하루에 7시간씩 피아노를 치며 그 상처를 표현했다.
그러나, 클래식 피아노를 전공할 수 없는 어려운 형편으로, 아빠의 피아노 실력은 밤무대 건반 아저씨로 전락해 버렸다. 그때부터 였을 것이다. 그 고독하고 외로운 마음을 밖에서 채워보려 한 날들의 시작 말이다. 아빠는 술과 밤무대 환경, 여자들로 둘러싸인 공간으로 내던져졌다. 밤무대 건반 아저씨가 된 후, 와이셔츠에 립스틱이 묻어 귀가하는 날이 잦아졌다. 그리고, 아빠 엄마는 성격, 살아온 환경들이 너무 달랐기에 자주 부딪혔다. 아빠는 차라리 그 자리를 피하기로 다짐했는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들이 많아졌다. 내가 엄마와 가장 친한 친구가 된 배경이 아빠의 부재라는 게 참 아이러니 하다.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늘 울며 아파했다. 초등학교 4학년 외동딸에게 아빠의 외도를 말 할 수 밖에 없었던 엄마의 마음을 지금도 다 헤아리기 어렵다. 더 이상은 혼자 견딜 힘이 없었던 거겠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전부인, 내 우주 같은 엄마가 매일 같이 눈물 흘리며 슬퍼했다.
나를 지극히도 사랑했던 아빠의 마음과는 반대로, 나는 아빠를 미워하고 마음을 점점 멀리했다. 그 정점을 찍은 건 내가 고등학생 1학년 때였다. 내가 살던 동네 한 곳에 모텔촌이 있었다. 악기를 전공하느라 레슨 받고 11시가 넘어 버스에 내려 집에 가는데, 모텔촌과 가까운 곳에서 아빠와 어떤 여자가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길은 흔히 말해 나의 나와바리 같은 곳이었다. 모른척 지나가고 싶기도 했지만, 아빠가 나중에 발뺌할 것이 분명하기에 나는 그 자리에서 "아빠"하며 나의 존재를 보였다. 당황해 나를 계속 부르는 목소리를 뒤로한 채, 집으로 뛰어갔고 그 이후의 기억은 없다. 때론, 너무 괴롭고 힘든 순간은 자연히 머릿속에서 삭제된다. 그래야 내일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겠지.
아빠에겐 늘 세컨폰이 있었다. 바깥 생활을 하다 잠깐 짐 가지러 오는 몇 일 사이, 큰 짐가방에서 "우우웅"하며 울리는 세컨폰을 발견한 건 늘 나였다. 단순한 그의 성격대로 비번은 늘 0000, 2580, 1111 같은 식이었다. 그 폰에 담겨있던 사진, 문자 메시지 내용을 확인 후, 매일 같이 밤마다 엄마 몰래 숨죽여 눈물 흘리는 날의 연속이었다. 소리없이 울며 그렇게 나도 모르게 철이 들어 버렸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아니 그 이전부터, 대학생 때까지 평생을 바깥 생활하느라 나와 엄마를 힘들게 한 원수같은 아빠를 내 마음속에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엄마한테 제발 이혼해서 편하게 살라고 당부했다. 딸내미 바라보고 참고 또 참았던 엄마가 용기를 내어, 이혼 서류를 들고 아빠랑 서초 법원으로 향했다. 공휴일도 아니었는데 휴관이어서, 결국 서류 접수도 못한 채 발걸음을 돌렸다. 그것으로 뜻을 받아들였던 건지, 엄마와 아빠는 힘겹게지만 가정을 유지시켰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리더십 있어야 할 자리에서, 아빠는 말을 하려 할 때마다 더듬었다. "아..아.안녕하세요. 저..저..저는 " 이렇게 말을 더듬다 보니 당연히 타인 뒤에 숨게 되고, 당당하게 서지 못했고, 인정받지 못한 채 살아갔다. 그래서 매일 같이 술 없이는 그 상처와 외로움을 달랠 길이 없었고, 그 어두운 그늘은 점점 주변까지 뻗쳐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아빠는 형제, 가족들에게도 철없는 동생이었다. 알고 보니 아빠는 대학교에 합격 했었다고 한다. 큰아버지가 입학금을 주셨는데, 그 돈을 써버려서 입학하지 못한 정말 철없는 사람이라고 가족들에게 들었다. 너무나 아빠에게 어울리는 행동이라 그렇게만 알았다. 그런데, 인생 말년 아빠와 대화하며 그 입학금을 들고 어디에, 무엇을 하러 갔는지 듣게 되었다. <언어치료>였다. 대학교를 포기 할 만큼 아빠는 고치고 싶었던 거다. 형제, 친척들에게는 또 철없는 사람으로 찍혔지만, 그는 너무나 진지했다. 결국, 대학교도, 치료도 흐지부지 되며, 아빠의 인생의 단추가 또다시 어긋나버렸다. 아빠의 평생의 삶은 늘 꼬이고 엇갈린 채였다.
슬픔과 고독에 꽈악 조여진 좁은 마음. 남들에게 베풀 줄도 모르고, 엄마가 화가 나서 방문을 잠그고 자도, 아침까지 한번 열어보지 않는 무관심하고 차가운 사람이었다.
아빠의 장례식에서 친구 아저씨를 통해 들은 이야기다. 내 결혼식을 마치고, 아빠 집에 친구 3분이 오셔서 같이 술을 드셨다. 평소 아무리 베풀지 않더라도, 그런 특별한 날은 대접할 수도 있지 않은가? 아니, 대접해야 마땅한 날이지! 그런데, 그날도 아빠는 여전했다. 원래도 자기중심적인데 병세가 시작되니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더 심해져, 당신은 배려, 대접 받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장례식장에서 타인을 통해 듣게 되는 아빠의 이야기들은 전부 씁쓸했다. 철이 없다라는 건, 그를 사랑하는 마음 가득 담아 표현한 최고의 찬사이다..
조아빠는 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13년의 긴 시간을 혼자 살았다. 씁쓸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잉꼬부부가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아내의 부재는 아빠의 삶에 그리 큰 타격감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결혼해서 분가한 후, 그 허전함을 달랠 길이 없어 수많은 술로 매일을 지새우다 결국 병세가 시작되었다. 아빠는 아내보다 자식을 더 사랑했고 삶의 전부로 여겼나보다.
엄마의 짧았던 투병 두 달 동안, 나는 온전히 엄마의 보호자가 되어야 했다. 그때는 아빠가 옆에 있어도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않는, 어색한 셋의 시간이 이어졌다. 엄마가 돌아가신 10년 후, 아빠의 병세 앞에 난 또 아빠의 온전한 보호자가 되어야 했다.
난, 원수같은 사람을 책임지고 돌볼 만큼 사랑이 많은 사람이 아닌데..
그래서, 그 다음 이야기는 내 힘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