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아빠를 용서하라구요?>

by 뇽뇽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영혼이 떠나버린 엄마의 모습 앞에서 처음으로 인생의 공허와 허무를 깊이 느꼈다. 부단히 노력하며 살아온 삶의 결국이 죽음이라니, 그렇게 나에게도 죽음이 피부로 경험되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이 죽음 앞에 '후회하지 않는 삶이란 무엇일까' 생각할 때마다 내 머리를 가득채운 단어는 '용서'였다. 서운하고, 슬프고, 속상한 감정 대부분은 '사랑'에서 파생된 것이다. 사랑으로 묶어지지 않은 관계에서는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상처와 증오도 결국 사랑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죽음 앞에서 의미있는 삶을 묵상할 때마다 떠오르는 '용서'라는 단어에 난 원수같은 조아빠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고3. 입시를 앞두고 그 어느때보다 간절히 대학을 위해, 삶의 방향,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구하며 눈물로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기도할 때마다 '아빠를 용서'하라는 마음이 생겼다. 정말 짜증났다. 부끄럽지만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 기억하시죠?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것도 있지만, 분명히 '간음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근데 아빠가 간음했잖아요. 근데 용서하라고요? 싫어요. 못해요." 원수같은 아빠를 내 마음 한구석으로 밀어놓은 채, 내가 원하는 것들만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과 친해지고 싶어 간절히 기도할수록, 아빠를 용서하라는 부담이 더욱 커졌다. 1년 반동안 하나님과의 실랑이 시간을 보낸 후, 난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다. "마음대로 하세요. 제 앞에서 딴 여자 손 잡고 지나간 아빠를 제힘으로는 도저히 용서못해요. 제가 용서하길 원하시면, 불쌍하게 보이는 마음이라도 주시던지요. 제힘으로는 할 수도, 아니 용서하기 싫어요."라며 아주 미세한 틈을 열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성경에는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구절이 있다. 그 어느 구절보다도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이다. 먼지만 겨우 들어올 정도의 마음을 열어 불쌍히 보이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신기하게도 조금씩 관점이 변했다. 사랑이 담긴 애잔하고 안쓰러운 마음은 아니지만, 한 인간으로서 그저 불쌍하게 보이는 마음이 조금씩 생겼다. 내가 그의 부모도 아니고, 되레 내가 돌봄을 받고 짠하게 여김을 받아야 하는 자식의 입장인데 말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긍휼히 여긴다는 것' 그 아름다움의 비밀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불쌍하게 생각하니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조금씩 생기고, 그러다 보니 그의 상처와 아픔이 보이고, 그 상처를 품다 보니, 저절로 나의 상처까지도 부드럽게 만져지는 아름다움의 순환을 경험하게 되었다.

원수를 용서하라는 말씀 앞에 한 뼘 정도 마음의 문을 열 수 있게 되었다. 실낱같은 틈이었지만, 그 작은 틈을 통해 예상치 못한 빛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빛은 내 마음 곳곳에 오래 닫혀 있던 문들을 흔들어 깨웠다.


나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예배에 빠진 적 없는 쉽게 말해, 교회 모범생이었다. 엄마 때문에 빠질 수도 없었을뿐더러, 피아노 반주를 하다 보니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매 예배에 참석해야만 했다. 설교 내용은 거의 비슷했다. "죄인인 우릴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자주 들었던 이 이야기가 어느 순간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덕적 죄의 여부와 상관없이, 내가 진짜 죄인임을 깨달았다. 죄와 십자가가 오버랩되어 영화같이 눈 앞에 펼쳐졌다. 도저히 부끄러워 엎드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은 또 아빠를 생각나게 하셨다.

그분은 나 같은 죄인을 십자가 사랑으로 용서, 용납해 주셨다. 그 십자가 사랑 안에는 당연하지만, 아빠도 포함되어 있다. 난 그렇게 큰 사랑으로 용서받았는데, 내가 아빠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건, 너무나 이기적인 것이었다. 내가 그와 다를 바 없는 죄인임을 직면한 이후, 나는 십자가 사랑으로 아빠를 진심으로 용서하게 되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원수를 용서해야 하는 줄 알았다. 이 용서 또한 내가 하는 게 아님을 그제야 깨달았다.

분명 주인공은 나인데, 누군가가 이 시간을 주도해 가는 듯했다. 나는 그저 그 과정을 편히 바라볼 뿐인 것 같은, 묘하고도 신기한 마음이었다. 이 홀가분하고 가볍고 기쁜 마음을 아빠에게 표현하고 싶었다.

맥주와 오징어땅콩 과자를 준비해, 매일 밤 고독하게 술을 마시는 아빠에게 대화를 신청했다.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이 받았던 상처, 뇌리에 박힌 장면들, 대화들을 쏟아냈다. 연 끊고 살고 싶었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받은 십자가 사랑으로 나도 이제 아빠를 용서한다고 고백했다. 아빠와 나. 우리는 펑펑 울며 서로를 안아주고 있었다. 그 곳은 묶인 것이 한순간에 풀리는 아름다운 천국이었다.

물론, 아빠의 잘못된 행위 자체를 공감하고 이해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내면에 쌓인 자유롭게 말 못하는 답답함, 타인과 비교당하는 여러가지 아픈 상처들을 안아주고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마16:19>


'용서'. 실낱같은 마음의 틈만 열어도 그 이후엔 다 이끌어가시니, 그저 자유롭고 감사하고, 신기하다.

그분의 일하심을 목도하는 그 기쁨이 내 삶에 임하니, 지옥과 같이 묶였던 실타래들이 다 풀어져 모든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내가 그를 마음으로 용납한 후, 얼마되지 않아 아빠는 병원에서 암, 파킨슨 병을 진단받았다. 관계 회복 전에 병세를 알았다면, 끝까지 나에게 무거운 짐만 얹는 사람으로 남았을텐데, 이 모든 삶의 과정을 인도하시는 내 인생의 진짜 주연되시는 그 분의 일하심이 참 신기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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