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아빠에게 채워진 족쇄
서른 살. 아직 꽃다운 나이에 나는 ‘뇌 병변 파킨슨’ 진단을 받은 아빠의 유일한 보호자가 되어버렸다. 파킨슨이라 하면 몸이 점점 굳어가는 병이다. 아빠는 그나마 다행으로, 팔과 상반신은 괜찮았다. 마치 어디 도망가지 못하게 꽁꽁 묶어 놓은 것처럼, 양쪽 다리가 굳어가기 시작했다.
아빠의 파킨슨 진단과 6개월에 한 번씩 대장내시경 검사, 신랑의 해외 취업으로 해외 거주. 이 세 가지가 거의 동시다발적인 시점에 겹쳐 버렸다.
나는 결혼 후 바로 시댁에서 생활했기에, 해외에서 진짜 우리만의 신혼생활이 시작되는 거였다. 마음이 아프지만 평생을 두고 아빠를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난 아픈 아빠를 두고 타지로 향하는 길을 선택했다.
타지에서의 매일은 아빠 걱정이었고, 한국에서의 날은 타지에 있는 신랑 걱정이었다. 그렇게 난, 어디에서도 사랑하는 이 두 남자 때문에 가장 행복했으며, 늘 불안했다.
6개월에 한 번씩 대장내시경을 진행해야 하는 아빠를 위해, 적어도 3개월에 한 번씩 한국에 나왔다. 그동안 매일 같이 영상통화로 아빠의 안부를 확인하며 통화했지만, 직접 아빠를 만나보면 못 본 사이에 여기저기 깊은 상처들이 많이 보이곤 했다.
장애가 생긴 아빠의 집에는, 길다란 하얀 봉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 한 폭 남짓의 간격으로 설치된 봉을 잡고 이동하는 것이었다. 눈도 어두워진 아빠는 봉의 거리를 잘못 봐, 허공을 잡고 넘어지기 일쑤였다. 무게중심을 아예 가누지 못하기에 낙상의 위험이 매우 높았다. 잘못 부딪히면 생명까지 위협받는 아찔한 상황에서, 아빠는 매일 혼자 지내야만 했다.
영상으로 통화를 하는 어느 날, 아빠의 눈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또 다른 날은, 머리에 스태플러 7번을 박고 온 아빠를 만나야 했다. 새벽에 봉을 또 헛잡고 넘어져 머리에서 피가 철철 흘렀는데도, 통증이 없다고 몇 시간을 방치하다 보호사님 발견 덕분에 119로 응급실을 방문한 거다.
점점 더 굳어가는 다리로 인해 결국, 아빠는 실내에서도 휠체어로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실내에서 휠체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의 근육도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혼자 있는 아빠에게 운동 겸 거동 생활은 생명의 위협을 받는, 너무나 위험한 것이었기에 최후의 보루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리고, 자주 가는 화장실의 이동도 위험해져 이동식 소변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아빠의 집은 엘리베이터 없는 주택 2층이었다. 아니, 호실은 202호지만 실제 3층 되는 높이의 집이었다. 한국에 나와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집으로 올라갈 때면, 중간에 한 번의 쉼은 꼭 필요한, 높고 많은 계단을 거쳐야 했다.
아빠는 평소 집에서 컴퓨터로 바둑 두는 게 취미라 외출이 잦은 건 아니었지만, 휠체어 생활하는 아빠에게 수많은 계단은 인생 가장 험난한 길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3개월에 한 번씩 병원 가는 시간 외에는 거의 외출이 없었다. 사실, 아빠는 목욕도 혼자 시원히 할 수 없는 상태였기에, 방문 목욕차 서비스를 이용했다. 집 앞에 도착한 방문목욕 차량에서 서비스를 받는 것이었다. 시원하고 개운하게 목욕 받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목욕 후 힘이 다 빠져, 계단 손잡이를 붙잡고 낑낑 힘을 내어도, 그의 다리는 맘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결국, 아빠는 이렇게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우리 형편이 조금만 더 여유로워, 아빠가 엘리베이터 있는 집에서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며 마음 찢어지는 생각을 늘 하곤 했다.
이 험난한 인생길 같은 계단에 대롱대롱 매달려 겨우 내려온 아빠와 함께 병원으로 출발했다. 아빠의 휠체어를 끄는 젊은 딸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눈으로, 귀로도 들린다. ‘쯧쯧쯧’ 혀 끌차는 소리가 내 모든 감각에 전달되어 다가온다. 그럴 때 난 아빠에게 더 크게 사랑을 표현한다.
그 시간, 내 나이 또래 대부분은 아기를 태운 유모차를 끌고 다닌다. 나는 그 시간, 나보다 무거운 아빠를 태운 휠체어를 밀며 병원을 향한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접수, 진료, 입원을 진행했다. 그야말로 난 아빠의 몫까지 두 배로 뛰어다녔다. 코로나의 시기와 상관없이 아빠는 상주 보호자가 필요하기에, 난 6인실 남성 병동의 보호자가 되었다.
대장내시경 진행을 위해 먹어야 하는 물약. 알약이 나오지 않았던 그때는, 시간 맞춰 물과 약을 먹으며 속을 비워야 했다. 문제는 다른 것도 아니고 ‘대장내시경’이라는 것이다. 수시로 화장실을 가야 했다.
볼일을 마친 회장님을 안전하게 귀가시켜 드려야 하는 기사처럼,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아빠에게 난 최고의 서비스를 드렸다. 잠결에 혹시 손잡이 잘못 보고 넘어지면 안되기에, 난 화장실 문 앞에 서서 그의 호위무사가 되어있었다.
이렇게 긴 밤을 보낸 후, 다음 날 아빠는 검사실로 향했다.
검사 전에 마지막으로 진행할 수 있는 상태인지를 확인한다. 준비가 되지 않으면 다시 검사하기 때문이다. 귀엽고도 고집불통인 우리 조아빠는 ‘이 정도면 됐어, 충분해’라고 했지만, 직접 확인한 나는 다르게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고집불통 아빠가 검사실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침대에 누운 채 다시 나왔다.
수면마취로 잠든 아빠가 병실로 올라온 시간은, 다른 환자들의 점심 식사 시간이었다. 속을 좀 더 비운 후에 내시경을 다시 진행하자고 했기에, 내시경 복장 그 상태로 병실로 들어오게 되었다.
본인은 달콤한 꿈에 빠져있는 동안, 그 냄새와 민폐로 다른 환자들의 맛있는 점심 식사를 너무나 깊게 방해했다. 그의 온전한 보호자인 나는 주변 분들과 간호사 선생님들께 죄송하다는 인사를 드리는 방법 말고는 없었다.
조금 후, 잠에서 깬 아빠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해맑았다. 다음부터는 제발 내 말 좀 들으라는 딸의 조언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검사 결과는 다행히 깨끗했고, 선생님은 6개월 후에 다시 검사해서 확인하면 될 것 같다고 하셨다.
이걸 6개월 후에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