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인생 역전 꿈꾸며 한심하기만 한 아빠가 귀엽게 보이기 시작했다.
십자가 사랑을 깨닫고 난 후, 내 언어생활의 변화가 생겼다. 타인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귀엽다'라는 표현을 자주 하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만날 때가 더 많지만, 그 때문에 내 입에서 부정적인 것들과 험담을 쏟아내고 싶지 않았다. ‘귀엽다’라는 건, 감싸주고 사랑하고자 하는 나의 의지적 표현이었다.
십자가 사랑을 깨닫기 전의 난, 그 누구보다 열심히 타인을 험담하고 판단하는 사람이었기에, 내 입에서 감싸주는 따뜻한 말이 나온다는 게 나도 신기했다.
그 사랑을 경험한 후, 나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대로인 나의 일상이 생명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채워진 곳이 되었다.
천국은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니다. 예수님 사랑으로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면, 바로 그곳이 천국인 것이다. 아직 얽히고 묶인 마음으로 매일을 살아가는 그도, 이 비밀을 깨달아 남은 평생의 시간을 진정한 자유를 얻어 살았으면 좋겠는 바람이 커졌다. 아빠를 위한 기도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빠가 밤무대 건반 아저씨로 활동했던 시절, 다리에 힘이 풀려 중심을 잃고 넘어진 적이 있었다. 매일 같이 마시는 술 때문인지, 병의 징조인지 알 수 없었다. 같은 증상이 몇 번 반복되어, 불안한 마음으로 우리는 병원을 향했다.
5년 전, 어려운 형편 탓에 미련스러울 정도로 아픔을 참고 참았던 엄마의 병세와 죽음 앞에서, 난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엄마의 몸을 검사했을 땐 이미 직장암 말기, 간과 폐에 전이 된 심각한 말기 암 상태였다. 항암을 해야 겨우 6개월이었는데, 엄마는 2달도 버티지 못하고 천국으로 가버렸다. 그 정도가 될 때까지 자식으로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허무함으로 가득했다.
나의 유일한 피붙이인 아빠한테만이라도 최소한 자식 된 도리를 다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었다. 그 기도의 덕분인지, 지금 생각하면 아빠의 모든 병세의 시작과 끝을 내가 다 발견하고 대응할 수 있었다.
솔직히 이 정도의 무겁고 힘든 여정인 줄 몰랐기에, 용감하게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아빠는 욕실에서 샤워하다 미끄러져 갈비뼈에 금이 가 동네 병원에 입원했다. 아빠 차트를 보던 의사는 ‘갈비뼈도 문제지만, 작년에 대장 검사한 결과가 안 좋으니 당장 내시경을 해봐야 한다’라고 했다. 입원한 김에 진행한 결과, 대장암 초기였다. 내시경으로 걷어 낼 수 없는 밑 부분에 자리 잡은 암 조직까지는 제거할 수 없었다. 그 암을 제거하는 방법으로는, 인위적으로 직장(直腸)을 밖으로 빼내어 평생 인공항문 주머니를 차는 것이었다. 아빠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거부했다. 혈액을 타고 전이가 되면 더 이상 손 쓸 수 없는 상황이 됨을 알면서도, 강경한 아빠를 설득할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아빠는 앞으로 5년 동안, 6개월에 한 번씩 대장내시경을 꼭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아빠의 넘어짐 증상은 술 취해서 나타나는 문제와는 다른 것이었다. 뇌 CT 결과 왼쪽 다리로 연결되는 작은 모세혈관들이 막히는 ‘뇌경색’이 시작된 것이었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리에 힘이 풀리고, 중심이 앞으로 쏠려 넘어지는 일이 잦아졌다.
아빠의 유일한 취미는 집에서 컴퓨터로 바둑 두는 것이었다. 재활을 위해서라도 의지적으로 운동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활동이 집 안에서였다.
몇 개월 후 검진 결과, 뇌경색이 점점 심해서 양쪽 모세혈관이 막히고, 결국 ‘뇌병변에 의한 파킨슨’ 진단을 받았다.
그 해, 난 해외로 취업한 신랑을 따라 옆 나라로 생활의 거처를 옮겼다. 사실, 아프기 시작한 아빠를 홀로 남겨두고 해외로 떠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엄마의 죽음 앞에서, 삶에 미리 정해진 순서란 없다는 걸 절실히 느꼈기에, 후회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고 싶었다.
조아빠의 생명을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맡기며 기도했다.
그 후로 적어도 3개월에 한 번씩 한국에 나와 아빠와 시간을 보냈다. 사실, 나도 오랜만에 나온 한국행에 친구들이랑 만나서 놀고 싶었다.
그러나, 목빠지게 딸만 기다렸던 아빠는 그 시간을 본인과 온전히 보내길 원했다.
대장내시경을 앞둔 아빠 눈치로 내가 좋아하는 치킨도 못 먹고, 한국에서의 거의 모든 시간을 병원에서 아빠와 함께해야 했다.
사실, 일반인들은 대장내시경을 입원해서 진행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거동이 불편해진 아빠는 집에서 화장실을 오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금식하면 기운도 없고, 차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여러모로 아빠에게는 입원하는 방법이 제일 편했다.
입원한 아빠는 거동이 불편해 24시간 곁을 지켜줘야하는 상주 보호자가 필요했다.
그렇게 난, 남성 6인 병실에서 조아빠의 상주 보호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