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노보다 내가 더 쓰다.
아메리카노가 혈관에 흐른다.
이 말을 이해한 당신, 진정한 사회인으로 인정해드립니다. 땅땅땅.
나와 아메리카노의 첫 만남을 회상해본다면, 아마 스물한 살 즈음이었을 것이다. 서울 어딘가에서 면접스터디에 들어가 합격을 위해 열심히 고군분투하던 그때, 5명이 옹기종기 모인 맥도oo의 중앙 테이블에서.
길지 않은 인생이었지만 그때까지 나에게 있어서 '커피'란, 시험기간에 내 잠을 깨워주고 정신력을 지속시켜 주는 존재, 오후 두 시에 시작되는 교수님의 강의 시간을 버티게 해주는 존재, 식당에서 밥을 먹은 후 100원을 넣어야 한다고 쓰여있지만 버튼을 누르면 그냥 뽑아져 나오는, 그저 맛있고 달달한 '자판기 커피, 믹스 커피' 그 자체였다.
그런 내 인생에서 아메리카노를 처음 맛봤을 때의 충격이란.
그때 당시 마셨던 것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는데, 이게 무슨, 음식을 태우고 남은 잿가루를 넣은 것인지. 왜 이런 쓰디쓴 물을, 달달하지도 않은데 커피라고 칭해야 하는지도 모를, 이런 액체를 사람들은 좋아하는지. 정말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다.
"딱 세 번만 마셔봐. 그러면 저절로 먹고 싶어 질걸?"
마법주문도 아니고, 딱 세 번만 마셔보라니. 뭐, 세 번 마신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했기 때문에 결국 그 이후로도 두 번이나 더 마셔보았지만, 내가 느끼는 것은 똑같았다. 너무 썼다.
합격한 이후에도 나는 아메리카노의 쓴 맛에 적응하지 못하고, '카페모카'라는 달달한 메뉴를 발견하여 그것만 줄곧 마시기 시작했다. 물론 회사에서 단체로 커피를 사 마실 때는 아메리카노보다 조금 더 비싼 카페모카는 시킬 수 없었고 아메리카노를 주문했지만, 여전히 그때 마셨던 아메리카노는 나에게 쓰디썼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생활 5년 차쯤 되었을까. 내 인생에 큰 고비가 찾아왔다.
새로운 부서에 발령을 받았고, 생전 처음 보는 업무를,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하게 되었다. 지독한 내향형이었던 나에게는 새로운 사람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것도, '식사하셨어요?'라는 스몰 톡을 하는 것도 정말 힘든 일이었고, 나이에 비해 초고속 승진을 했던 나로서는 결국 회사 내 '생태계 파괴자'가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매한 포지션인 상태로 회사생활을 하게 되었다. 거기에 더하여, 자기들 딴엔 장난이라고 던지는 농담 한마디가 주눅 들어있던 나에게는 매일매일 비수로 꽂혔고, 기분이 나쁘면 기분이 나쁘다고 표현하지 못했던 그 나날들은, 힘든 일이 있어도 부서 내에서 사적으로 술 한잔 할 사람이 없는 그 나날들은 정말 나를 너무 힘들게 했으며, 바로 그 1년이 내 인생의 처절한 암흑기였다.
그때부터였을까. 아메리카노에서 더 이상 쓴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인생에 재밌는 일이 없었다. 항상 꿈으로 가득 차 있던 내 20대 초반까지의 화사하고 찬란했던 시절이 너무 그리웠다. 매일 눈물이 났고,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는 숨이 턱 막히고 심장이 불규칙하게 뛴다는 느낌을 받았다. 신체적으로 이상이 느껴졌을 때, 아 이건 정말 아니다 하고 정신과에 찾아갔고 그곳에서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았지만 먹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내 속 이야기를 털어놓으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가벼워졌고, 내 의지로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덧 그 부서에서 1년을 꽉 채우고, 새로운 부서로 이동하게 되었다. 야호! 인사발령이 나기 30일 전에는 디데이를 세주는 어플도 깔아서 휴대폰 배경화면에 위젯 설정을 해놓기도 하였다.
새로운 부서는 평소에 내가 와보고 싶어 하는 부서였고, 외근을 자주 나가는 곳이었다. 그리고 내 또래 직원들이 많았고, 업무의 강도도 이 전보다 훨씬 편했으며, 그곳에 계신 선배들도 정말 어떻게 이런 선배가 있지? 할 정도로 능력과 인품까지 겸비한 선배들이 있었다. 출근해서 일하는 것이 너무 좋았고, '행복'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평생 이곳에만 있고 싶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이 부서에 온 지 2년 만에 승진을 하게 되었고, 또 다른 부서로 이동하게 되었다.
최근에 발령받은 부서는 그 전의 부서와는 다르게, 새벽 4시 40분에 기상하여 일찍 출근해서 업무를 시작해야 했고, 비록 18시에 퇴근하긴 했지만 출근부터 퇴근까지 정신없이 바쁜 부서였다. 높은 사람에게 보고를 해야 할 서류를 주로 작업했기 때문에, 정성껏 작성한 나의 보고서가 상사에게 까이는 것은 일상이었고,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때는 출근 후 빵과 커피를 사서 다 같이 아침을 먹을 때, 점심때 친한 직원들끼리 회사 밖으로 나가 카페에 앉아 수다를 떨 때뿐이었다.
우리의 루틴은 이랬다. 새벽 5시 50분 언저리쯤 출근해서 한창 정신없이 일을 하다가, 8시 아침식사 시간이 되면 "아, 일을 이렇게나 했는데 아직 9시도 되지 않았다니" 하며 직원들과 함께 나가 빵과 커피를 사 온다. 그리고 사무실 가운데 책상에 다 같이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 빨아먹는다. 그때 느끼는 아메리카노의 맛은,
아, 정말 천국의 맛이다.
아메리카노가 혈관으로 퍼진다면 이런 느낌일까. 이곳에 온 뒤로, 내 인생 처음으로 아메리카노를 남기지 않게 되었다. 더 이상 아메리카노가 없으면 하루가 제대로 시작되지 않은 기분이었고, 허전했고, 심지어 뜨거운 아메리카노의 맛도 알아버렸다. 아침에 빵과 함께 '뜨아'를 마시면 내 몸이 녹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나는 이 회사의 완벽한 부속품이 되어버렸다. 그뿐이었다.
'녹슬어서 없어지느니, 차라리 닳아서 없어지겠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인생 명언을 적어놓았던 내 작은 수첩 첫 장에 적어놓은 말, 그 말이 현실로 이루어진 삶이었다.
그래서 행복한가? 아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적어도 지금은 행복하지 않다. 닳아서 없어지는 게 낫겠지만, 이런 식으로 닳고 싶진 않았다. 내 삶에는 변화가 필요했다.
그때부터였나, 더 이상 아메리카노가 쓰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그것보다 더 씁쓸해졌기 때문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