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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초하 Jun 28. 2023

자꾸 불안해서 뭔가 써야될것 같다.

축구선수는 엄마의 정보력과 아빠의 돈이 필수조건이라던데?

아들은 축구부가 있는 학교로 결국 전학했다.


꿈이 축구선수니까 축구부가 있는 학교로의 전학은 당연하다고 천진난만하게 말하는 아들.

집을 떠나 여럿이 해야만 하는 합숙도 운동부 특유의 군기도 모두 괜찮을 거라고 덧붙이며 

꿈을 위해 한 발짝 나가는 본인을 자랑스러워하는 아들.

어린 나이의 합숙, 뛰어난 재능 없이 꾸는 꿈, 폐쇄적인 운동분위기와 적극적이지 못한 내 성격 등 

이 모든 상황에 혼자 겁이 덜컥 나는 나.

운동선수의 엄마는 어디든 따라다니고 뒷바라지해줘야 한다던데... 축구선수라니!!


운동이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소위 예체능은 딱 두부류의 아이만 한다고 난 늘 생각했다.

능력이 특출 나거나 모자란 능력을 개인과외로 커버할 만큼의 경제력이 있는.

그래서 처음엔 둘 다 해당이 없는 내 아이가 꾸는 꿈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저 평범하게 엄마품에서 중학교에 다니고 성적과 씨름하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진학해서

적당한 직업을 가지고 취미로 운동을 하는 것에 대하여 몇 번이고 말했다.

그러나 그때 아들은 꿈이니까 해볼 수 있는 거라고 천진하게 웃었다.

그 천진함에 그 순수한 열정에 나는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내 아이에게 너무 바라는 것이 없다는 게 아이에게는 상처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유명한 축구 선수가 되지 않아도 아니, 중간에 포기하고 나오더라도 하고싶것이 생겨서 직진하는 아들이 

싫지 않았고 솔직히 멋있고 부러웠다.

이만큼 훌륭히 커준 아이가 대견했다.

지금 잘 못해도 지금 즐거우면 된다, 꿈을 이루지 못해도 과정에서 배우는 것이 있을 거라며

대책 없이 늘 긍적인 남편은 아들이 정한 꿈을 힘닿는 만큼은 응원해 주자고 했다.

(아들은 남편의 성격을 닮았다.)



아들이 축구를 한다고 전학을 했다는 말을 지인들에게 하자 대부분이 같은 말을 했다.

축구선수는 엄마의 정보력과 아빠의 돈이 필수조건이라던데?
기죽지 않도록 자주 들여다보고 먹을 것도 넣어주고
선발하려면 감독과 코치 기분도 살펴야 해!
너 일하는 괜찮겠어? 돈은 있는 거야?

안 그래도 걱정 많은 내 성격에 직접 운동하는 지인은 없는 내가 주변에서 듣는 이야기는

내가 막연히 두려워하는 것과 비슷했고 그럴 때마다 남편과 아들은 아니라고 걱정하지 말라며

나는 달랬다. 그렇게 고민하고 두려워하는 동안 두 달여 시간이 흘렀다.

동네에서 축구신동으로 불리는 아이들이 프리미어리그를 꿈꾸는 축구명문중학교로의 전학은 아니었다.

아들이 전학한 학교는 우리 집에서 40여분 떨어진 전교생의 절반이 축구부인 시골중학교,

감독님이 경기도 출신이라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작은 학교의 축구부였다. 

1, 2학년의 축구부원이 아직 미달인 학교. 어쩌면 그래서 쉽게 입학할 수 있었던 작은 중학교로 전학한 아들.

내가 걱정해야 하는 것은 아들이 경기를 뛸 수 있도록 기본기를 더 배우고 훈련을 잘하고 있는지

1학년과 2학년 선수 모집이 잘 되어 하계 혹은 추계리그에 참여할 인원이 되는지를 걱정했어야 하는데

나는 너무 모르는 게 많았다.

지금 이 학교는 3학년 경기가 주축이었고 실제 1학년과 2학년 학생들은 교체 선수로 참여하고 있었고,

인원이 부족하다 보니 학교 측에서도 기존의 선수들도 새로운 선수 한 명 한 명을 귀하게 여겼다. 

어쩌면 아이가 적응하고 운동을 배우고 축구를 하기에는 아주 적합한 조건이었는데 나는 왜 이렇게까지 

먼 일들만 걱정했던 것인지..

아들은 생각보다 잘 적응한 것 같았다. 저녁훈련이 힘들어도 즐겁다고 했다. 합숙생활도 금세 적응 했다고 했고 그간 두 번 나왔던 외박에서도 밝고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며 나을 안심시켰다.

매일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과 핸드폰이 통제되어 연락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조금 외로울 뿐 

돈이 엄청나게 들어가지도 않았고(숙소사용료와 식대가 포함된 일정 금액의 회비는 있다.)

자주 들여다보고 감독이나 코치의 기분을 살펴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1학년인 아들이 학교에 잘 적응하는지 지켜보면 될 뿐이었다.

물론 일부 부모들은 매 경기 참관을 하고 학교에 가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축구부 아이들 모두의 간식이나

식사를 챙기기도 했지만 그런 모든 것에 강제성은 없었다. 일하는 엄마라서 불편한 것 하나도 없었다.

그저 내가 그런 모든 것을 잘 해내지 못하면서도 그로 인해 내 아이가 차별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를 언제나 괴롭혔다.

-

나의 어린 시절은 '결핍' 그 자체였다.

보호자가 없는 어린 시절, 전학으로 늘 위축되어 전전긍긍했던 초등시절, 단 한 번도 예체능을 정식으로 배워보지 못했고 부모가 학교에 오지 않아 차별받았던 나의 중고들 시절. 꿈을 가져보기는 커녕 잘할 것 같지 않은 것들은 시도조차 하지 않으며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들을 열심히 하며 치열하게 살아온 나의 젊은 시절.

그 모든 과정들에 겪었던 아픈 감정을 감추고 겉으로는 평범히 살아온 듯했던 나.

결혼을 하고 학부모가 되었지만 학부모가 되어서도 일어나지도 않은 많은 일들을 가정하고 두려워 것은 바로 내 문제 그 자체였다. 오직 내가 나를 불안하게 하고 두렵게 한다. 늘 실패에 초첨을 맞추고 실패에 대한 이유를 변명을 준비한다. 아무 일도 없는데 안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고 그 모든 공포와 두려움을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아 괴로워한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나는데 나는 여전히 한치도 자라지 못하고 내 안에 꽁꽁 숨겨둔 결핍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한번 더 알게 되었다. 나는 그저 내가 느꼈던 불친절한 사회에 대한 공포감을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포장하고 벌벌 떨고 있음을... 아이의 성장에서 다시 한번 마주했다.

나는 정말로 아이를 잘 키우고 있는 것일까? 

꿈을 향해 가는 아이를 보며 나는 또 내 안의 어린 나를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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