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과 자존심이 있으면 빌런이다
사회생활이 다 그렇게 앞과 뒤가 맞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매번 새로운 형태의 부적응을 겪곤 한다.
사회복지사가 어려운 이웃을 정말 어려워하고 장래희망에 절대로 희망을 품어서는 안 되며, 직업으로서 사명감을 갖는 것이 그 직업을 그만두는 계기가 된다는 것을 이미 다 알았음에도 나는 또 다른 영역에서 아직 사회인으로는 멀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래서 사회생활의 빌런이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빌런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상황에 맞추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빌런이다.
모두가 최선을 다하지 않을 때 조금 더 최선을 다하면 빌런이다.
의욕을 가지고 많은 질문을 던지며, 지금보다 나은 방향을 제시하면 빌런이다.
악의적인 비난을 웃으며 넘기지 못하고 맞받아친다면 빌런이다.
정확히 무엇인지 모를 때 정확히 무엇인지 물으면 빌런이다.
너보다 나이가 많아서 빌런이다.
성격을 드러내서, 성격을 드러내지 않아서 빌런이다.
빌런의 역할이 필요해서 빌런이다.
희생자라고 생각했는데 빌런이다.
감정을 가져서, 의미를 부여해서 빌런이다.
기꺼이 빌런이 돼도 좋다는 쓸데없는 자신감 때문에 빌런이다.
정의라는 말을 하면 빌런이다.
자존심 때문에 이익을 놓치면 빌런이다.
무엇보다 신념과 자존심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면 빌런이다.
사회와 집단에서의 빌런은 그저 패배자 그뿐이다.
이상을 가지고 노력하는 것은 사회인이 가져야 할 덕목이나 태도가 아니다.
정의로운 인간을 회사에서 원한 것이 아니다.
내가 가진 그 이상과 노력이, 그 정의가 최선이라고 과연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저 맞추고 낮추고 외면하며 그 모든 것을 티 나지 않고 훌륭하게 수행하는 것,
그것이 사회인으로 직업을 가지고 오래오래 남는 방법이다.
치기 어린 바른말 의욕적인 행동은 그저 모난 돌이 되어 쉽게 정 맞고 자리를 잃어버린다.
모든 것은 남겨진 자들의 기록임으로 자리를 잃는 순간 빌런이자 악 그 자체가 된다.
그러니 어떠한 마음도 드러내지 않고 어떠한 순간에도 평정심을 가지고
죽음 같은 것들을 떠올리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최선일뿐.
나의 죽음이 아닌 타인의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남겨진 내가 공포와 외로움에 떨며 남은 생을 살게 되는 모습이 상상되어,
누군가가 미워질 때마다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면 그럭저럭 지금을 위로할 수 있었다.
지나가는 행인이든, 직장에서 만나게 된 타인이든, 가장 가까운 가족이든.
어떠한 형태로든 미움이 싹터 내 안에 분한 마음이 생길 때면.
미워하는 사람이든 사랑하는 사람이든 내가 어떠한 마음을 품은 누군가의 죽음에 기뻐할 수 없는 사람이라서 이런 상상과 생각이 나를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 아닌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나는 남겨지는 게 무서웠다. 내가 어떠한 형태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마주해야 함이,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더) 죽음보다 더한 공포로 자리 잡았다.
혼자 남겨지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빌런이 되어 사라지지 않기 위해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그렇게 삶과 죽음이 연결된다.
그렇게 사회의 두꺼운 가면을 쓴다.
이런 꿈을 자주 꾼다.
이상하게도 나는 꿈에서 늘 외롭게 서있다. 내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차가운 눈초리를 받으며
북적이는 곳에서도 아무도 나를 알은체하지 않는다.
없는 사람취급하며 외롭게 서있는 나를 곁눈질로 살핀다. 수군거린다. 비웃는다.
나는 누군가의 관심을 바라면서도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행여 나를 차갑게 보는 이와 마주친 눈빛에 겁에 질린 모습으로.
절대 들어갈 수 없는 영역 밖에서 간절히 들어가고 싶어 하는 형태로 나는 그렇게 자주 서있곤 했다.
외롭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한 나.
견뎌내는 삶이 얼마나 고단했던 걸까?
현실에서 외로운 사회인이 되면 더 이상 이 꿈을 꾸지 않게 될까?
그럭저럭 살아보자.
세상밖으로 사라져 버릴 수 없다면 생각을 멈추고 그럭저럭 살자.
괴로움은 내 안에서 내가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도 안되면, 그때는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