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좋아해서 그리고 그 안에 실린 만화가 좋아서 그걸 찾아 시오리길을 마다않고 달려갔던 시골 아이는 만화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소년이 되었다. 동네에 만화책방이 생긴 것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이었는데 부모님께 용돈을 받는 일이 흔치 않던 시절이니 거기를 들락거리며 만화책에 빠질 일은 없었다. 게다가 만화책을 보는 것 자체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쓸데 없는 짓'으로 치부되던 시절이니 용돈이 넉넉하다 한들 마음 편하게 만화책방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스토리에 빠질 일은 더 더욱 힘들었다. 이런 유년시절의 갈증이 아마도 나를 만화의 세계에 빠지도록 몰고 간 원천일 지도 모르겠다.
그런 유년 시절을 지나 십대를 지나 성인이 되기까지 수많은 작가의 작품을 섭렵하며 스토리에 빠지고 만화와 같은 시각적인 매체만이 줄 수 있는 해학적인 묘사와 따로 상황을 문자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위트에 매료되었다. 그 기 세월을 돌이켜 굳이 한 사람을 꼽으라면 그것은 단연코 고우영(高羽榮) 화백일 것입니다. 만화영화의 대부분은 일본 것이고 출판만화도 일본 작가의 불법 복제작품이 많았던 시절에 왜색을 싹 덜어내고 우리 정서에 맞는 그림체와 시대를 넘어서는 유머와 위트로 나를 사로 잡았던 고우영 화백의 작품들. 그중에 으뜸은 역시 "만화 삼국지"이다. 지금도 고우영의 삼국지라 불릴 만큼 원전인 삼국지를 작가 특유의 헤석으로 너무 무겁지 않게 그 만의 감각으로 유쾌하게 그려냈다.
그 시절 만화 속에 작가만의 상상력으로 하드코어 유머를 이렇게 발휘한 다른 작품을 나는기억하지 못한다. 목숨을 걸고 서로를 향해 창을 휘두르는 엄중한 장면에서 뒤통수를 치는 저런 유머를 날린다. 그의 작품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엄청난 위트이다.
자기 이름의 우(羽)자와 한자가 같다고 유비 관우 장비 중에 관우(關羽)만 공을 들여 멋있게 그렸던 작가의 익살도 즐겁다. 고우영의 삼국지를 일독하신 분이라면 관우가 얼마나 멋지게 그려졌는지 기억하실 것이다.본인의 이름 "우"자가 관우의 '羽'자와 같다고 떠들면서도 정작 본인의 자화상은 쪼다 유비와 비슷하게 그린 것에서 그의 재치가 돋보인다.
지금은 장소와 사긴을 불문하고 스마트폰을 들어 손쉽게 웹툰을 소비하는 모습을 본다. 기술에 발전에 따라 동네아이들이 모이던 만화책방은 사라지고 만화 컨텐츠는 대부분 디지털 장비를 이용해 즐기는 세상이 되었다. 친근한 얼굴들이 옹기종기 모여 각자가 좋아하는 장르의 먄화책을 골라 열댓 권씩 쌓아놓고 부지런히 읽어 내려가던 시절은 이제 시대물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 남았을 뿐이다. 김이 모락모락 하는 큰 주전자가 올려진 난로를 마주하고 딱딱한 의자에 앉아 누가 빨리 읽나 내기라도 하듯 열심히 만화책을 읽어 내려가던 그 겨울의 어떤 날은 지금도 손으로 그려낼 수 있을 것처럼 선명하다.
고우영 화백은 2005년에 작고하였고 그 해에 만화가로는 최초로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그가 일간스포츠에 만화삼국지의 연재를 시작한 해는 1978년이다. 내가 틈만 나면 만화책방에 들어 앉아서 만화로 세계관을 넓히던 까까머리 중학생 때이다. 이렇게 또 "라떼는 말야"의 레파토리를 쓰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