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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호딩(Digital Hoarding)

내 사전에 '삭제'란 없다

by 북한강

디지털 시대에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쉽게 일상과 추억을 기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스마트폰에 달린 디지털카메라가 우리의 일기장이 된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여행지의 낭만적 풍경, 집 안에서의 평범한 순간, 한밤중의 심술궂은 고양이, 특별한 날의 요리까지 모든 것이 소중히 기록됩니다. 스마트폰을 살 때 분명 저장 공간으로 쓰이는 내장 메모리는 제한되어 있다고 들었지만 마치 무한대의 공간이라도 있는 것처럼 무심히 사진을 찍어대곤 합니다. 물론 사진과 영상 파일들은 우리에게 큰 기쁨을 주지만, 동시에 디지털 혼돈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그 제한을 아는 사람들은 스마트폰의 저장 공간을 확장할 요량으로 구글 포토와 같은 클라우드 저장 서비스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마저도 무료 서비스를 이용하는 경우에는 15Gb로 공간이 제한되고, 같은 공간을 Google 드라이브, Gmail, 그리고 구글 포토가 공유합니다. 물론 추가 저장 공간이 필요하면 Google One을 통해 유료로 구독하여 더 많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구글 포토와 같은 클라우드 저장 서비스는 우리의 추억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역할을 하지만, 대부분의 무료 사용자들은 저장 공간의 한계를 금방 실감하게 됩니다. 사진을 찍는 것은 쉽지만, 그것을 정리하고 분류하는 일은 쉽게 미뤄지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휴대폰이 메모리가 부족하다는 경고 메시지를 받을 때까지 무작정 사진을 찍고 저장합니다. 그 사진을 찍던 빛나는 순간들의 기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흐릿해지지만, 삭제할 용기를 차마 쉽게 내지 못합니다. 이런 증상을 가리켜 디지털 호딩(Digital Hoarding)이라 부릅니다. 실제 생활에서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모아두는 병을 저장강박증 또는 호딩 장애(Hoarding Disorder)라고 하는데 거기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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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장 공간이 부족하다는 알림을 받아도, 우리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정리는 내일 하자"며 또 사진을 찍습니다. 구글 포토가 마치 끝을 알 수 없는 무한대의 저장 공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스마트폰이 메모리가 한계에 곧 도달한다고 알람을 울리면서 몸을 떨어 대지만 남긴 기록들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 준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어떤 시대보다도 다양한 추억을 쉽게 기록할 수 있는 복을 누리지만, 만들어진 자료를 분류하고 정리하는 것은 특별하고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저장강박증이 아니라도 추억이 얽혀있거나 애정이 담긴 물건을 쉽사리 버리지 못하는 우리의 심성이 그렇게 만든 것일 수도 있으니 너무 나무라지도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스마트폰의 저장공간이 부족해서 최신(그래서 비싼)의 스마트폰 모델로 바꾸겠다면 대리점을 찾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 최신형 모델로 바꾸는 비용이면 구글 클라우드에 가족 모두의 사진을 복사하고도 남는 저장공간을 임대하여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찍은 사진을 보관하려고 돈을 낸다는 것에 쉽게 동의하지 못하시는 분들은 적절한 정리 습관을 들이는 것이 디지털 공간을 건강하게 사용하는 열쇠일 것입니다. 유료 서비스를 사용하시든 부지런히 별로 저장할 가치가 없는 사진(예: 남편 얼굴 나온 거)을 정리하는 것이 우리의 소중한 추억을 디지털 자료로 오래 간직하며 즐길 수 있는 방법입니다.


사진이 없어졌다고 잊혀질 추억이라면 있어도 돌아볼 필요가 없는 기억일 뿐입니다.

삭제는 선택이 아닌 필수!


디지털 호딩(Digital Hoarding): 저장장치와 클라우드 서비스의 용량이 허락하는 한 많은 양의 디지털 파일을 삭제하지 않고 계속 저장하는 습관을 일컫는다. 이것은 종이 문서나 물건을 쌓아 두는 저장강박증과 유사한데, 다만 대상이 디지털 형태라는 점이 다르다. 이에는 사진, 이메일, 문서, 심지어 애플리케이션 데이터 등이 포함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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