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도
작년 12월 중순(벌써 작년이 되어 버렸네), 오럴테스트를 치르고 나니 한 학기가 벌써 끝이 났다.
무거운 부담이 몰려올 때마다 여행하듯 공부하자, 부끄럽고 창피한 이 모든 순간도, 어려워서 쩔쩔매는 이 당황스러운 경험도 모두 여행처럼,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어디든 떠나는 거야, 그렇게 이 마음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넉 달을.
다음날 동이 트기도 전에 코펜하겐 가는 버스에 올랐다.
늦은 밤 코펜하겐을 출발해 네덜란드에 자정 즈음 도착하면, 다음날 이른 아침 기차를 타고 벨기에 리에주로 간다. 그곳에서 한국 공연팀을 만나고 서너 일을 더 머문 뒤, 마지막 종착은 나의 그리운 벗, 사유리와 딸 아마야를 만나러 브뤼헤로 넘어간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 다시 만난다면, 7년이 걸린 셈이다.
버스는 강이고 들이고 바다고 숲이고 온통 너그러운 자연을 곁에 두고 열심히 달렸다.
홀가분해야 할 내 마음에 자꾸 드는 질문, '지난 4개월 나는 무엇을 배웠나', 그러게 나는 무엇을 배웠을까.
코펜하겐에 잠시 들러 7년 전 함께 공부했던 크리스티나를 만났다. 늘 조용하게 그림 그리던, 그러나 한번 말이 터지면 끝이 없이 청산유수처럼 흐르던 내 친구. (지금은 코펜하겐 대학교에서 인류학을 공부하고 있다. 아참, 이 친구는 내 책에도 등장한다. 새벽녘, 도자실에서 물레를 돌리며 서로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카페 안쪽에 앉아 있던 나를 발견하곤 내 이름을 부르는데, 눈물이 날 뻔했다. 우리가 이렇게 (늙어) 다시 만날 줄!
크리스티나에게 물었다. 그때 난 어떤 사람이었니? (인류학을 공부하니 멋진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너는, 버터를 좋아하고, 고추장을 좋아했어. 크크크. 피아노를 좋아하고, 사람들을 잘 웃기고, 그럼에도 명석했고, 창의력 포텐이 터졌지. 니 덕에 한국말 하나 아직도 기억해 'michigetne kkk (미치겠네 ㅋㅋㅋ)'"
정말 미치겠다. 수많은 말 중에 이 말을 기억하다니!
이 친구 덕분에 보른홀룸의 추억을 몽글몽글 마음에 품고 암스테르담에 잘 도착했다, 다음날 아침, 마음대로 바뀌어버리는 네덜란드 기차 시간표 때문에 낯선 역에서 한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덩그러니 놓여있던 조율 안된 땡땡 얼은 피아노가 보여 한참을 앉아 놀았다. 몇몇 승객들이 몰려와 박수도 쳐주고 환호도 해 주었다. 역시 혼자 놀다 사람 불러 모으는것은 인터네셔널급 대장이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리에주에 잘 도착해 극장에 먼저 들렀다. 모던한 건물 밖에도, 내부에도 한국 공연팀의 포스터가 가득했다. 이 팀을 알게 된 지도 벌써 스무 해가 다 되어간다. 정의는 개나줘버리고 나나 잘살자는 마음으로 불평없이 살아가던 어느날, 공연 포스터의 질문이 화살 되어 꽂히던 날을 기억한다. 삐뚤어진 모양으로 삶이 온전치 않을때마다 이 팀의 공연은 어쩜그리 시간 맞춰 잘도 찾아왔다. ('휴먼푸가'도 그 중 하나의 공연이다. 서울연극센터에 기고했던 리뷰 : https://www.sfac.or.kr/theater/WZ020400/webzine_view.do?wtIdx=11903)
지난 3년간 한국과 벨기에를 오가며 제작된 공연이다. 3년의 이야기를 한 시간 반속에 펼쳐 놓았다. 잡힐 듯 잡히지 않은 미끌미끌한 오브제들과 복잡한 배우들의 말과 단어, 행동과 표정, 이에 비해 한없이 아름다웠던 영상까지. 이리보고 저리봐도 이번 공연은 낯섦 덩어리다. 그런들 어떠랴 어차피 세상은 온통 물음 덩어리지 않나! 이거면 됐다했다.
공연이 끝이 나고 극장 숙소에서 배우와 스텝들과 함께 늦은 저녁을 먹었다.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한국어, 영어가 뒤섞인 저녁 식탁 위에서 이상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얽히고설켜있던 형형색색의 스트링이 배우들의 몸을 휘감을 때 보이지 않은 끈으로 내 몸도 휘감고 있음을 느꼈던 것처럼. 불쑥 찾아온 것이 아니었을 이 아름답고도 낯선 시간이 어쩌면 저 먼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것은 아닐까. 늘 그렇듯이 황혜란 배우와 배요섭 연출의 공연은, 위로와 질문을 동시에 남긴다. (나중에 공연리뷰만 다시 적어보자)
리에주를 떠나 브뤼헤에 왔다. 기차역에 마중 나온 사유리를 보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7년 전 크리스마스와 새해도 사유리와 함께 보냈네 그러고보니) 정말이지 너무나 그리웠고 보고 싶었다.
사유리 딸, 아마야가 뱃속에 있을 때 배냇저고리와 베개, 손싸개와 턱받침, 버선까지. 좋은 천을 사서 한 땀 한 땀 꿰어 만들어 보냈다. 뱃속에 꿈틀하던 그 아이가 벌써 다섯 살이 되었다니! (우리는 늙었고 아이는 쑥쑥 컸구나!)
머무르는 내내 한국음식을 만들어 먹고 새벽이 한참 지날 때까지 수다를 떨었다. 그간 전화로 어려워서 꺼내기 어려웠던 말을 나누며 서로 위로하고 칭찬했다. 크리스마스 저녁에는 우리 셋 피아노 반주에 같이 노래하고, 춤도 췄다. 2015년, 함께 도자기를 빚고 그림을 그리던 때, 사유리와 나는 날이 흐리면 종종 기타와 아코디언을 들고 들로 나갔다. 언제 비가 올지 모르니 남의 창고 아래에서 노래하고 춤을 췄더랬다. 뿌연 안갯속에서 열심히도 새긴 청춘이 엄마로, 학생으로 다시 만나 그 위에 겹겹이 추억을 쌓는다.
새해가 밝기 이틀 전, 다시 덴마크, 내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넉 달 전, 아무것도 모르고 버스값의 두 배나 주고 자리표도 없는 입석 기차표를 끊고 이 도시에 들어올 때,
오는 내내 무거운 짐 챙기느라 창밖도 보지 못했다.
왜 석사를 (문화유산이면 자국부터 챙겨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한국도 아니고, (문화유산과 관련정책이 뛰어난) 프랑스도 아닌, 덴마크에 가서 하느냐 라는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창밖의 모습을 또박또박 바라보며, 내가 넉달 배운것이 무엇일까 돌이켜보니, '태도'
유창한 영어 실력과 문화유산에 대한 뛰어난 전문적 지식도 중요하다만,
사고의 시작을 공평한 눈으로, 서너세대를 넘어보는 기다란 안목으로, 타협하고 이해하는 과정속에서 가져야 할 내 눈의 태도를 배운다. 그게 남은 40년을 (팔십에 죽는다 치고) 슬기롭게 헤쳐나갈 지혜로운 삶의 자세일테다. 나는 그것을 배우러 이곳에 왔고, 찬찬히 알아가는 중인듯 하다.
자, 그럼 한달 마저 남은 방학, 씐나게 놀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