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내면의 차가움과 마주하다
연극 놀이부터 시작된 동아리 생활은
한동안 내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주었다.
함께 웃고, 떠들고,
조금은 어설프지만 진심을 나누는 시간들.
그 순간만큼은,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하지만 본격적인 공연 연습이 시작되면서,
연습실의 공기는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엔 기대 반, 설렘 반의 도전이었다.
대본을 읽고, 인물을 이해하고,
장면을 함께 만들어가는 일이
낯설면서도 흥미로웠다.
그러나 막상 연기를 시작하고부터
나는 점점 혼란에 빠졌다.
입을 열었을 때,
내 말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웠고
목소리는 자주 흔들렸으며
감정은 말보다 한참 뒤에야 따라왔다.
아니, 따라오고는 있었을까.
나는 무언가를 '표현하는 사람'이기보다는,
그저 잘하지도 못하는 무언가의 '척'을 하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지만,
무엇이 맞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다른 친구들의 연기를 보며
내 안의 모자람은 더욱 선명해졌다.
누군가는 정말 그 인물처럼 느껴졌고,
누군가는 자연스럽게 울기도 했다.
그땐 감정의 표출이 곧 연기 실력이라 믿었던 것 같다.
나도 울고 싶었다.
그 장면은 충분히 슬펐고,
울 만한 이유도 있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았다.
진심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정말 내가 감정을 느끼긴 하는 걸까.
농담이 아닌 마음으로,
'혹시 내가 싸이코패스는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한 번은 감정을 끌어내고 싶어서
예전에 정말 슬피 울었던 영화를 떠올렸다.
하이라이트 장면을 반복해서 보고,
그 순간의 마음에 나를 이입해보려 애썼다.
그러다 누군가,
"연습 안 하고 핸드폰만 본다"고 말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국 감정을 끌어내지 못했으니까.
그저 바보처럼 가만히 있었다.
감정 훈련 시간도 있었다.
불 꺼진 연습실,
다 같이 미친 듯이 웃어보고,
어떤 수를 써서라도 울어보는 시간.
나는 끝내 울지 못했다.
그다음 시간, 소감을 나누는 자리에서
그 순간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그 시간을 보냈는지 말하다가
뜻밖에 울컥해졌다.
입을 떼는 것도 쉽지 않았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물이 먼저 나왔다.
어린 시절의 상처,
어쩌면 지금까지도 나를 조용히 붙잡고 있는 결핍들.
그런 이야기를 어디서도 해본 적 없었다.
어디서건 쉽게 꺼낼 수 있는 이야기들도 아니었다.
그날, 그 사람들이었기에 가능했던 걸까.
말들이 이상할 만큼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과 함께.
다들 조용히 들어주었다.
누구도 흘려듣지 않았다.
누군가는 눈물로,
누군가는 눈빛으로 조용히 응원해주었다.
그 시간은, 이상하리만큼 따뜻하게 남아 있다.
부끄러움보다 먼저 떠오르는 건,
그 조용한 위로들이다.
나는 연습실이 연기만 배우는 공간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고,
또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그 즈음 깨달은 것도 있다.
나는 상대의 눈을 잘 마주하지 못했다.
상황을 유지해야 할 때,
괜히 웃음이 터져 흐름을 끊기도 했다.
그건 단순한 산만함이 아니라,
사람을 마주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던 나의 모습이었다.
그 시절의 연습실은,
내가 얼마나 서툰 사람인지
조용하고도 명확하게 알려주던 공간이었다.
그 시간들은,
연기를 떠나 한 사람으로서
내 부족함을 깊이 마주하게 해주었다.
그 모자람 속에서,
난 내 마음 속에 무언가를 꺼내고 싶다는
갈증이 느꼈다.
정확한 방법은 몰랐지만,
이 숙제를 던져준 연기라는 행위 안에서,
어쩌면 무언가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감정을 마주하고 싶다는 마음,
그걸 표현해내고 싶다는 갈망.
그건 결국,
연기가 나를 차갑게 만들어주는 방식이었다.
좋은 의미에서의 차가움.
어지럽던 마음을 정리해주는 선이었고,
조심스럽게 나아가도록 이끌어주는 온도였다.
그 여름은 유난히 더웠지만,
나는 그 속에서
내면의 차가움을 만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