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가끔은 그리운, 그 시절의 가벼움.
연극 동아리에 들어가겠다는 결심이
곧바로 실행되지는 못했다.
당시의 나는 입대를 앞두고 있었고,
그 마음을 조용히, 마음 한 켠에 두어야만 했다.
군 복무 기간은
나 자신과 고요히 대면할 수 있었던
값진 시간이었다.
고단함도, 혼란도, 생각보다 많았던 날들이었지만
그 속에서도 종종 동아리를 떠올리며,
전역 후의 내 모습을 그려보곤 했다.
그 시간들을 조용히 지나온 후,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복학에 대한 막연한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설렘 때문이었을까.
동아리를 떠올릴 틈도 없이
학기가 시작되어버렸다.
아마 2학기 복학의 애매함도
그 감정에 조용히 스며들었을 것이다.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의 반복은
겉보기에 평범했지만,
어딘가 흐릿하고 지루한 감정들이
하루하루를 감싸고 있었다.
동기들과 후배들과 대화를 나누고,
웃으며 일상의 즐거움을 찾아가며 지냈다.
하지만 속으로는,
무언가 놓친 것만 같은 기분이 늘 남아 있었다.
학기 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수업을 마치고, 학과에서 진행하는
학기 마무리 술자리에 가기 위해
동기들과 함께 캠퍼스를 나서던 길이었다.
운동장 옆 길목에서
한 여학생이 혼자 서 있었다.
작은 전단지를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고 있었다.
처음엔 무슨 홍보인가 싶어
슬쩍 시선을 피했다.
가끔 있는 외부 마케팅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그녀가 다가와 건넨 말은,
뜻밖에도 익숙한 이야기였다.
학교 극장에서 곧 시작될
연극 동아리 공연을 보러 오라는 말.
그 순간,
한동안 잊고 지냈던 어떤 감정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저, 다음 학기에 연극 동아리 들어가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려던 것도 아니었다.
그 말이 숨처럼 자연스럽게
툭, 입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조용한 약속 하나가 생겨났다.
그리고 계절이 한 번 더 바뀌고,
새 학기가 시작되자
나는 연극 동아리에 들어갔다.
즐거웠다.
특히 처음 경험했던 연극 놀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시작 전, 제시어를 하나 외친다.
술래가 멈추라고 외치는 순간,
그 자세가 제시어와 연관되어 있어야 한다.
누군가는 당황한 얼굴로,
누군가는 몰입한 얼굴로
기상천외한 동작을 취하곤 했고,
그 기발함에 미소가 번지기도 했다.
'상대방을 거울처럼 따라 하기.'
한 명이 이끌기도 하고,
서로가 서로를 이끌기도 했다.
'너 이 동작 돼?'라는 식의
경쟁 아닌 경쟁이 생기기도 했고,
서로를 배려해 가며
호흡을 맞춰가는 순간이 되기도 했다.
'지블리쉬'라 불리는 놀이도 있었다.
실제 언어가 아닌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외계어 같은 말로
주어진 상황을 이어가는 방식이었다.
단어에 특별한 의미는 없었지만,
억양과 손짓, 눈빛과 맥락을 통해
뜻이 만들어지고 전달되는 신기한 경험.
이런 놀이들은 단순했지만,
그 단순함이 주는 몰입과 즐거움이 분명히 있었다.
어린 시절에 해봤을 법한 놀이들이었지만,
나이가 들어 다시 해보는 건,
의외로 더 깊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이가 들어 그런 놀이를 한다는 게,
누군가는 어색하다고 여겼을지도 모르지만,
그곳에선 달랐다.
이상할 만큼 편안했고,
그 편안함이 오래 남았다.
어쩌면,
나는 늘 동심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순간만큼은,
누가 잘하고 못하고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
함께 웃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두가 즐거웠고,
서로가 연결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 따뜻함이 말없이 위로가 되었다.
함께 공연을 보러 다니던 시간들도 기억에 남는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무대를 보며
설레는 마음을 느꼈고,
공연이 끝난 뒤엔
짧은 감상들을 나누며 각자의 인상을 정리했다.
잘 굴러가지 않는 머리로나마
어떻게든 풀어보려는 진지함이 있었고,
그 열띤 토론이 나는 좋았다.
술자리 역시 좋았다.
잔잔히 취기가 오르면
극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은 왜 존재하는가 같은
감성적이고도 철없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누군가는 웃으며 넘기기도 했고,
누군가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그 감정의 기복들이
이상하리만치 소란스럽지 않게 느껴졌던 건,
아마도 말보다는, 말하지 못한 것들이
서로를 조용히 연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
나는 누군가와 그렇게 솔직하게 감정과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시간들이 오래 지속되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조금 더 가벼웠을까,
아니면,
더 어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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