쩍.
투명한 식탁 유리에 굵은 금이 갔다.
짧지만 둔탁한 그 소리는 온 집 안을 울렸다.
아이의 마음에도, 아비의 마음에도 동시에 금이 갔다.
며칠 전 어미는 아이를 데리고 시장 구석에 위치한 큰 장난감 가게에 들어섰다.
미리 정해둔 것이 있는 듯 바삐 걸음을 옮기더니 작은 박스 하나를 집어 들었다.
빨간색 매끈한 현미경이 종이와 아크릴 비닐로 만든 박스 안에 단정히 놓여 있었다.
아이의 눈은 반짝였다. 그것이 오빠의 크리스마스 선물인 걸 단번에 알아차린 것이다.
집에 오는 길. 아이는 깡충깡충 뛰며 어미를 뒤따랐다.
까만 비닐봉지에 담긴 바스락거리는 박스 비닐 소리, 단단하게 싸인 박스의 감촉.
'맞아! 선물이란 원래 이렇게 예쁜 케이스에 들어가 있어야 해.
내 선물도 틀림없이 저럴 거야. 인형? 인형이겠지?
얼굴 큰 아기 인형일까, 바비인형일까, 아니면 폭신한 곰 인형?
아무렴 어때, 뭐든 좋은 걸!'
크리스마스 아침이 왔다.
다 같이 모여 앉은 식탁에서 오빠에겐 커다란 박스가,
아이에겐 사탕처럼 포장된 손바닥만 한 작은 선물 꾸러미가 주어졌다.
아이는 실망하지 않으려 애를 쓰며 포장지를 뜯었다.
빨간 비닐 포장지에 싸여있던 건 분홍색 손거울과 빗 세트였다.
고개를 숙인 아이의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무심한 듯 포장지를 벗긴 오빠의 손에는 역시나 현미경이 들려있었다.
오빠는 잠시 들여다보더니 이내 아무 말도 없이 옆에 치워두었다.
밥을 먹지 않고 버티던 아이에게 아비는 말했다.
"밥 무라."
"안 무글끼다. 나도 인형 갖고 싶다 아이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웅얼거리듯 내뱉은 말이 결국 아비의 화를 불렀다.
"싫으믄 묵지 마라!"
아비의 숟가락이 식탁 위로 떨어졌다.
쩍.
식탁에 얹어진 유리에 굵은 줄이 생겨났다.
놀란 아이는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아비의 마르고 까만 얼굴에 서린 슬픔을 알아차렸다.
아이 둘을 먹여 살리며 겨우겨우 살아가는 부모에게 모든 소원을 들어줄 여유란 없었다.
일곱 살의 아이는 그때 깨달았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이 부모에게는 고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날 이후 아이는 마음을 거꾸로 말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메고 다니는 곰인형 가방이 그렇게나 갖고 싶었지만
마음을 꾹 눌러 담고 오히려 그 가방을 멘 친구를 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저거 지인짜 이상하지 않나~ 왜 저런 걸 메고 다니능가 모르게따.”
어미가 새 옷을 사주겠다고 해도 싫다고 고집을 부렸고,
먹고 싶던 간식도 “그거 맛때까리 읍따” 며 손사래를 쳤다.
혹여 부모가 속마음을 읽어 더 힘들까 봐 말로 마음을 포장하며 버텼다.
그렇게 아이는 모든 감정을 언어로 꿰매려는 사람으로 자랐다.
어미와 오빠는 달랐다.
좋아도, 싫어도, 억울해도, 기뻐도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아이 눈엔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굳이 말로 꿰맬부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무심한 사람들.
세월이 흘러 마흔이 된 나는
엄마의 침묵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엄마는 갑작스레 유방암을 진단받았다.
수술과 항암치료를 위해 병원 가까이에 사는 우리 집에 엄마를 모시기로 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누군가의 보호자가 되어본 적이 없던 나는
처음으로 보호자의 이름으로 엄마를 살피기 시작했다.
수술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엄마는 한쪽 가슴을 잃은 몸으로 피주머니를 달고 나왔다.
'며칠 후 반창고를 떼면 엄마는 가슴의 빈자리와 흉터를 보게 되겠지.'
입술을 꾹 다문 채, 눈을 감고 얼굴을 찌푸리며 견디는 모습.
아프다는 내색 하나 없이 견디는 그녀를 바라보며, 괜스레 내 가슴이 저릿했다.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고 항암치료 일정이 정해지자
나는 엄마와 눈썹 문신을 하러 갔고 이발기를 주문했다.
미용실에서 밀자고 했지만 엄마는 담담히 말했다.
"그냥 니가 밀으라."
나는 조심스레 엄마의 머리를 밀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손끝이 떨렸다.
떨리는 손길을 숨기려 일부러 농담을 꺼냈다.
“두상이 똥~그라니 이쁘데이~.”
엄마가 울까 봐 겁이 났다.
하지만 엄마는 울지 않았다.
짧아진 머리가 베개에 붙어 따갑다며 흘리듯 말했을 뿐이었다.
이후 엄마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장을 보고 밥상을 차렸고 새벽이면 운동을 나갔다.
항암 주사를 맞으러 가는 날에는 반찬을 미리 준비해두기도 했다.
그동안 해주지 못한 밥상을 이참에 다 해주려는 듯 보였다.
오래전 나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집을 떠났다.
그 후로 스무해가 지나도록 부모는 단 한 번도 내 집에 오지 못했다.
삶을 버텨내는 고단함이 서로의 발길을 막았기 때문이다.
나는 일 년에 두어 번, 명절이 되어서야 겨우 엄마의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런 내 식탁에 스무 해치 밥상이 매일 등장했다.
“우와, 이게 뭐꼬?”
내가 밥상에 감탄할 때면 엄마는 활짝 웃었고
"아 피곤해가꼬 입맛읍는데"
하며 밥먹기 귀찮아하면 엄마는 조용히 돌아서서 설거지를 했다.
나는 그렇게 매일, 엄마의 뜨거운 밥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마음이 내 귓가를 울리기 시작했다.
매일 샤워하며 조몰락거려 빨아내는 한쪽 가슴 대신 넣는 작은 뽕,
내가 짜증이라도 내면 조용히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눕던 엄마.
그럼에도 쉴 수 없었던 생활.
장 보기, 새벽 운동.
'지금이라도'라는 마음이 엄마를 채운 게 아니었을까.
2년이 지나 엄마는 모든 치료 과정을 견뎌내고 본가로 돌아갔다.
유리에 난 금에 놀라 모든 것을 말로 꿰매려 했던 어렸던 나는
엄마와 보낸 이 시간 속에서 조용히 바라보며 마음을 읽는 법을 배웠다.
마음은 억지로 포장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바라보고 기다리며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쩌면 어린 날 오빠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빨간 현미경을 품에 안고 말없이 들여다보는 걸 그리도 좋아했으니 말이다.
마음은, 각자의 방식대로 흘러가는 강물 같아서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조용히 자기 길을 간다는 것을, 나는 이제서야 알거 같다.
너무나도 다른 말로 삐뚤빼뚤 흘러가던 우리가
어느새 말보다 마음이 닮아가는 길 위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