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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림 속에 깨어나는 감각

by NINA

집 계약이 끝나간다.
이 집에 처음 들어올 때, 나는 오래 창가에 서 있었다.
거실 창 너머로 호수가 반짝였고,
그 물빛에 나의 새로운 시작을 비춰보았다.


짐을 풀던 날, 커튼을 달며 혼잣말을 했다.
“이 집을 나갈 땐, 더 안정적인 삶이 펼쳐지겠지.”

그때는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한 달도 지나지 않아
함께하던 사람과의 관계가 끝났다.


답답한 마음에 며칠 동안은 마냥 집 안에 머물렀다.
그러다 어느 날, 창밖으로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 살겠다고 마음먹게 했던 풍경이었다.

나는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호수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낯선 길은 나를 몇 번이고 헤매게 했다.
오솔길로 들어섰다가 다시 돌아 나오기를 반복했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으면 언젠가 길이 나타났다.


그 길을 찾을 때면

어디선가 잊고 지냈던 설렘이

조용히 다시 일어났다.


그 무렵부터 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사람보다 책이 편했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을 너무 쉽게 판단하는 나 자신이 싫었다.


책 속의 사람들은 나와 다르게 확신에 차 있었다.

그들의 생각은 단단했고, 문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따라 밑줄을 그었다.

그 밑줄이 내 하루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단단하지 못한 내가
단단한 이들의 글을 따라 한다고
곧바로 변할 리는 없었다.


다시 예상치 못한 일들이 찾아왔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마음 깊이 박힌 채

나를 오랫동안 흔들었다.


그 사이 계절이 몇 번 바뀌었다.

호수의 물결이 잔잔히 반짝일 때도 있었고

강한 바람에 휩싸여 바다처럼 크게 일렁일 때도 있었고

꽝꽝 얼어붙어 눈 속에 가려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봄이 오면 어김없이

호숫가엔 벚꽃이 흩날렸고,

연둣빛 새잎이 햇살에 반짝였다.


그렇게 호수도, 나도

쉬지 않고 흔들리며 살아냈다.


책을 따라 하기만 하던 나는

어느새 글을 남기게 되었고

유튜브를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엔 할 줄 몰라서

그다음엔 그들처럼 멋있고 싶어서

그들을 자주 따라 하곤 했고,

그러다 수없이 넘어졌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내가 자꾸 넘어졌던 이유는

그 속에 나를 녹여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를 녹여내려면 먼저 나를 벗겨내야 했는데,

그게 두려웠던 것이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내 안의 감각들이 살아났다.

내가 녹아들었을 때

이런 온도가 느껴지는구나.

내게는 이게 맞구나


슬픈 일도, 힘든 일도, 좋은 일도
그 사이를 지나며 나는 계속해서 달라졌다.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집중하던 나는
이제 내 안의 감각을 믿고 따른다.


그 감각은 조용하지만 확실했기 때문에.


며칠 전, 부동산에 들러 연장 계약서를 썼다.


2년 전의 나는 누군가와 함께 있을 미래를 꿈꾸며 설레여했지만

지금은 나로 가득 찬 이 집에서 혼자 있는 순간,

내 감각에 집중한 지금이 가장 설레인다.


그렇게 오늘도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걸었다.


누군가의 길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내디딘 발자국으로

삐뚤빼뚤 천천히 나만의 길이 만들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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