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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난 돌의 아름다움

by NINA

며칠 전 나는 두 사람을 만났다.
트루먼과 뫼르소.

겉모습은 전혀 달랐지만,

이상하게도 둘은 내 안에서 겹쳐졌다.

그들이 보여준 얼굴은 서로 정반대였지만,

결국 나를 오래 붙잡은 건

‘진짜 얼굴이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었다.




트루먼은 영화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다.

그는 현실을 산다고 믿었지만,

사실 그의 삶은 거대한 무대였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배우였고,

그들의 행위는 모두 대본에 불과했다.

나는 늘 미소 속에 마음의 빛이 담겨 있다고 믿어왔는데

영화 속 그 미소는 아무것도 담지 않은 껍데기였다.
나는 처음으로 미소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였을까.

늘 미소를 지으며 살아가던 그의 아내가

끝내 연기를 견디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릴 때,
나는 이상하게도 안도감을 느꼈다.

가면이 벗겨지고,

거짓미소가 깨지고,

마침내 살아 있는 인간의 얼굴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반대로,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 속 뫼르소는 어떤 연기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조차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그저 피곤하다고만 했다.

그는 어머니가 죽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것이라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고

당시 느끼는 것 이상의 슬픔도 안타까움도 연기하지 않았다.

세상은 그런 그를 냉혈한으로 몰아갔다.
며칠 후 그는 겁에 질려 누군가에게 총을 쏜다.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왜곡해서 해석하고

결국 그에게 사형이 결정된다.

살인보다 장례식에서 흘리지 않은 눈물이 더 큰 죄로 여겨진 이다.


세상은 언제나 ‘올바른 태도’를 정해둔다.
슬픔 앞에서 흘려야 하는 눈물,
남의 아픔 앞에서 건네야 하는 위로,
상황마다 요구되는 예의.

그 틀에 맞추면 ‘사회성 좋은 사람’이 되고,
벗어나면 ‘부적응자’라는 낙인이 찍힌다.




나는 이 두 얼굴 사이에서 내 모습을 보았다.
트루먼처럼 가짜 미소를 지으며 살 수도 없고,
뫼르소처럼 모든 연기를 거부하며 살지도 못한다.


남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소식이나 유행에 무심했던 나는

그 사람들 속에서‘잘 못 어울리는 사람’으로 여겨졌고,

내가 좋아하는 주제를 이야기할 때는
‘분위기를 이끄는 사람’이라 여겨졌다.

나는 늘 나였는데,
사람들의 시선은 계속 달라졌다.


그런 그들의 시선 속에서

나는 자주 멈칫거렸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말은 과연 무엇을 뜻할까.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이 내뱉는 또 다른 표현, 상대를 배척하기 위한 낙인일까.

예상 밖의 반응, 짐작되지 않는 생각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아, 어쩌면 이해가 안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잘 알아서 감추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애써 감추어온 감정이 누군가의 솔직한 얼굴을 통해 세상 위로 드러날까 두려워서.

누구나 마음속엔 감추고 싶은 결이 있고,

드러내기 망설이는 진심이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불안하고 두려워서 그 사람에게 낙인을 찍는 게 옳은 일일까.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이 말이 자주 떠올랐다.

우리는 왜 이 말을 따르고 있었을까.
돌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다운데..


매끈하게 다듬어지지 않아도,

울퉁불퉁 솟아나 있어도,

그것은 원래의 얼굴이다.


군데군데 가라앉아 있어도,

한쪽이 불쑥 솟아 있는 삐죽빼죽도 괜찮다.


남들이 원하는 표정과 역할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얼굴에 진짜 미소가 번진다.


물론 그 미소는 매끈하지 않
투박하고 어설플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안에는

꾸며지지 않은 진실이 담겨 있다.
그 진실이야말로

우리가 서로에게 가장 오래 남기는 빛이 아닐까.


p.s. 이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진솔한 얼굴 앞에서 당황하면서도

동시에 끌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덜 망설이고 더 진실하게 살아봐야겠다.

매끈하지 않고 삐뚤빼뚤하지만

아름답게. 나답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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