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보다 깨끗하게 가꿔온 우리 집 장판에 이사업체 직원들이 신발을 신고 들어올 때부터 나는 눈물을 꾹 참고 있었다. 이곳에서 보낸 세월이 무색하게 모든 짐이 빠르게 옮겨졌고, 새 집으로 출발하기 전 마지막으로 우리 집을 돌아봤다.
아기가 태어난 뒤 좁아질 대로 좁아져 원룸형 안방이라 장난스레 부르던 침실, 매일 바쁘게 이유식 큐브를 만들던 주방, 원래는 부부 서재였던 아기방, 티비형에서 서재형으로 가장 많은 변화가 있었던 거실, 결혼사진을 걸기 위해 남편이 직접 박은 못까지... 구석구석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렇게 짐도 추억도 꽉꽉 찼던 집인데, 한 순간에 텅 비어버린 모습을 보니 주책맞게도 울음이 터졌다.
이 집에서 결혼을 하고, 같이 쓸 가구를 고르고, 벽지를 고르고, 아기를 낳고, 휴직을 하고, 육아를 하고, 요리를 했다.처음 해보는 건 전부 이 집에서 했다.
남편도 나도 첫집을 마련하는 데다가 부동산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보니 집을 고를 때 많은 걸 따지지 않았다. 당연히 집은 남향이어야 한다는 엄마의 말도 흘려 들었다. 그저 직장에서 멀지 않고, 편의 시설이 많고, 예산 안에 들어오는 적당한 집을 몇 개 추렸다. 그리고 처음 들어갔을 때 탁 트인 전망이 마음에 들어 큰 고민 없이 계약을 했다.
그리 꼼꼼하게 보지 않았던 탓에 살다 보니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생겼다.해가 잘 안 들지 않고, 웃풍이 있어 자려고 침대에 누우면 은근히 찬 바람이 느껴졌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웠다.한 번 거슬리기 시작한 단점은 자꾸만 생각이 나서 꼭 이사를 가야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꿈꿨던 이삿날이 되자 너무 서운한 나머지 소리 내 펑펑 울고 말았다. 누가 나가라고 내쫓는 것도 아니고 원해서 하는 이사에 우는 내가 스스로도 황당했다. 그렇지만 집안일이며 인테리어에 나보다 훨씬 많은 공을 쏟았던 남편도 울컥하는 모양이었다. 나처럼 엉엉 우는 대신 붉어진 눈시울로 이렇게 말해주었다.
여보, 이 집은 우리 첫 제자 같은 거지.
내 첫 제자들. 2014년에 중3 담임과 제자로 만났으니 10년이 지난 지금은 어느덧 성인을 지나 20대 중반이다. 빠르면 결혼했거나 아기가 있을지도 모르는 아이들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내 모습은 정말이지 서투름의 연속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일에 매일 반강제로 초과 근무를 하니 몸도 마음도 피곤했고,퇴근을 하면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잠들었다가 새벽에야 부리나케 일어나 수업 준비를하곤 했다. 마음처럼 되지 않는 생활 지도에 학생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고, 학부모와의 전화 상담은 심호흡을 몇 번이나 한 뒤에 겨우 할 수 있었다.
그런 나를 보며 아이들은자신들이단지 나의 첫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신기해하고 행복해했다.원어민 선생님을 몰래 섭외해서 내 생일을 알아내고는 깜짝 파티를 열어주었고, 부족한 수업에도 늘 좋았다고 표현해 주었다. 화가 날 때는 소리 지르고 말 안 듣는 애들은 따끔하게 혼내도 된다며 귀여운 조언을 참 많이 해주었다. 편지를 1년 내내 정말 많이 받아서 편지로만 가득 찬 파일이 몇 권이나 생길 정도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과분한 사랑을 받은 해였다.
생각해 보면 우리 집도 그랬다. 내가 딱히 뭔가를 잘해주지 않아도 변함없이 날 맞이해 줬다. 나의 어떤 모습을 봐도 늘 같은 자리에 있었다.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그렇지만 내 첫 제자들을 영원히 가르칠 수 없는것처럼, 우리 집도 시간이 흘러 보내줄때가 왔던 것이다.그렇게 생각하면 좀 덜 슬프지 않겠냐고, 남편은 그렇게 날 위로했다.
이사 온 지 어느덧 세 달이 흘렀다. 살던 동네가 그리워질 줄 알았는데,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살던집이 생각난다. 짧은 만남 뒤 헤어졌지만 잊을 수 없는 첫 제자들처럼, 우리 첫집도 가슴속에 늘 따뜻한 기억으로 남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