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살 딸아이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책을 읽는다.
요즘은 명작동화를 읽고 있는데, 한글을 읽게 된 딸아이는 책 표지의 사소한 글자 하나하나 빠뜨리지 않고 읽으면서 이게 뭐야? 무슨 뜻이야?를 연발해서 나를 힘들게 한다.
특히, 딸아이가 유치원에서 배운 안데르센의 이름이 나오는 날에는 ‘이 책도 안데르센이 썼다’며 호들갑을 떤다.
그리하여 나도 책의 표지를 찬찬히 보게 되었는데, 책의 표지에 의외로 많은 저작권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
먼저, 책의 표지를 보면 3명의 저작자가 나온다.
‘원작’, ‘그림’, ‘옮김’이 그것이다.
번역글도 저작물일까?
책마다 옮김이(번역가)가 기재되어 있는데 안데르센이 쓴 글을 번역한 사람도 저작자가 되는 것일까?
저작권법을 펼쳐서, ‘2차적저작물’에 관한 조항을 보자.
원저작물을 번역ㆍ편곡ㆍ변형ㆍ각색ㆍ영상제작 그 밖의 방법으로 작성한 창작물(이하 “2차적저작물”이라 한다)은 독자적인 저작물로서 보호된다.
“번역” 역시 창작행위의 하나이므로, 원저작물을 번역한 글은 2차적저작물로서 저작권법에 보호된다.
할리우드 영화를 누가 번역하였는지에 따라 더 재미있기도 하고, 덜 재미있기도 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번역’ 역시 중요한 창작활동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번역글도 저작물이라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실생활에서 크게 2가지 의미가 있다.
안데르센은 1875년 돌아가셨으므로, 이미 그의 저작권 보호기간은 끝이 났다.
하지만 이때 저작권 보호기간이 끝이 났다는 것은 안데르센이 영어 또는 덴마크어(어느 나라 말로 썼을까요?...)로 쓴 원작의 보호기간이 끝이 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주희 님이 2010년에 안데르센 원작을 한글로 번역한 '나이팅게일과 황제' 역시 별개의 저작물이므로, 이 한글로 된 번역물에 대한 보호기간은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
따라서 만약 이주희 님이 번역한 '나이팅게일과 황제'를 오디오북으로 만들거나, 드라마에서 그대로 읽는다면 이주희 님의 저작권을 침해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번역글 역시 하나의 저작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외국의 동화나 소설책을 사용할 때는 원작의 저작권과 번역물의 저작권이 별개로 존재한다는 점을 꼭 기억해야 한다.
한편, 번역 역시 하나의 창작활동이므로, 이주희 님이 번역한 '나이팅게일과 황제'와 내가 번역한 '나이팅게일과 황제'는 읽는 재미가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출판사들은 이미 저작권 보호기간이 만료된 책에 대해 각기 다른 번역가들과 함께 자기들만의 '나이팅게일과 황제', '헨젤과 그레텔'을 출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서점에 가면 각양각색의 '헨젤과 그레텔', '신데렐라'가 존재하는 이유다.
또 다른 사례를 보자.
외국의 유명한 교과서가 한글로 번역되어 출판되는 경우가 많다.
이때 한국의 출판사들은 보통 원작의 저작권을 양도받는 것이 아니라, 교과서를 한국어로 번역해서 국내에서 독점적으로 출판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따라서 누군가가 교과서 원본을 자기 나름대로 한글로 번역해서 사용한다고 했을 때 출판사가 저작권 침해를 주장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출판사가 원본에 대한 저작권을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외국의 책을 한국에서 번역할 때 출판할 때에는 자신이 가지는 권리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무단으로 도용하는 사람에게 어떤 공격방법을 쓸지를 알 수 있다.
다시 책의 표지를 돌아가보자.
결합저작물이란?
'글'을 쓴 안데르센과 번역가가 있고, '그림'을 그린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안데르센이 쓴 글과 일러스터가 그린 그림의 관계는 무엇일까?
바로 '결합저작물'이다.
'결합저작물'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먼저 '공동저작물'에 대해 설명한 글을 다시 한 번 읽어보자.
2인 이상이 창작한 저작물에서 각자의 기여분을 분리할 수 없다면 공동저작물이 되지만, 2인 이상이 같이 창작했지만 각자의 기여분을 분리할 수 있는 저작물을 결합저작물이라고 한다.
한 곡의 노래에서 가사와 곡을 분리할 수 있는 것처럼, 위 책도 마찬가지이다.
글과 그림 부분을 각각 분리해서 이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안데르센의 글에 A 작가의 그림책이 나오고, B 작가의 그림책이 나오고, C 작가의 그림책이 나오는 것이다.
사소하고도 쓸데없는 이야기들이지만, 책 한 권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저작권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는 점이 재미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