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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한 오지랖

by 초린

나는 오지랖 부리는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다.

오지랖은 대게 남의 상황이나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전적으로 내 위주의 생각이나 행동이 튀어나와 생기는 현상 같았다.


'나라면 이렇게 했을 텐데'라는 생각이 속마음으로 끝나버리면 좋으련만

기어코 입 밖으로, 행동으로 꺼내는 바람에 생긴다는 게 내 지론이다.

오지랖을 부린다고 표현하는 것도 안 해도 되는 걸 굳이 했음을 표현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오지랖을 늘 경계하는 편이다.

혹여라도 생각해 준 말과 행동이 상대에게 불편하진 않을까

속마음은 '이렇게 하는 게 나을 텐데' '나라면..' 하는 마음이 들지라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려 노력한다.


말과 행동은 의식해서 하지 않는다 쳐도

본질적으로 오지랖을 부리지 않기 위해선 일렁이는 생각부터 바꿔야 한다.

내가 자유로이 하는 생각이 커지면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기 마련이기 때문인데


요새 내게 아주 오만한 오지랖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토록 경계했던 오지랖인 것을.


나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

마음만은 노벨평화상이라도 받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인생사 희로애락이 섞인 곳일지라도

모든 사람이 슬픔과 분노는 극복가능한 정도였으면,

희망차고 행복한 기쁨이 기본이었으면 하는 것이다.


가족이나 친구들은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는다. 그 정도면 살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곳곳에 약자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 몸조차 힘든 그 구부정한 몸으로 폐지를 줍는 노인들,

너무나 슬퍼 보이는 사람들,

허름한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


막연한 이 생각이 얼마나 오만하냐면,

개중엔 슬픔을 극복할 정도의 사람도 있을 테고

힘든 몸이지만 직접 돈을 번다는 것에 기뻐하는 노인도 있을 테고

힘든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을 잡고 있는 사람도 있을 텐데

나의 이 오만한 오지랖이 그들의 희망을 그저 동정으로 보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뉴스에 가끔 보이는 사각지대에 놓인 가족들의 극단적 선택,

장애우를 둔 가족들의 극단적 선택.

이 같은 현상은 사회가 오지랖을 부려주길 바라본다.

그들이 나 이제 좀 살만해요. 해도 더 들여다보는 사회.

사회가 좀 더 건강하고 상식이 통하는 나라가 되어,

모두가 기본 권리를 누리고 사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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