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마약범 아니에요..
농장도 다녀왔겠다, 나는 이제 세컨드비자까지 있는 몸이 되었다. 앞으로 일 년 사 개월을 비자 걱정 없이 마음 편히 살 수 있다는 생각과 나도 여느 성공한 워홀러처럼 돈을 차곡차곡 모아 여행도 하고 금의환향(?)이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처음 호주를 온 시점보다는 확연히 달라진 영어실력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게 술술 풀리진 않았다.
이전보다 조금 나아졌을 뿐 여전히 일자리를 구하는 건 어려웠다. 하지만 자신감인지 용기인지 모를 것이 낙담시키거나 무기력하게 만들진 않았고 계속 도전하게 만들었다.
일단 카페에서 일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때의 목적은 커피로 유명한 호주에서 바리스타로 일해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오로지 카페에 이력서를 내고 다녔던 기억이다. 수십개의 이력서를 넣고 면접끝에 카페 잡을 얻을 수 있었다. 커피제조는 순순히 주진 않았지만 그래도 카페에서 경험해 볼 수 있음에 감사했다. 스케줄도 점점 늘어났다. 일주일에 3번에서 4번 그리고 5번까지 나에게 맡겨주면서 신뢰를 쌓아가고 있었다.
시급이 워홀러에겐 적은 편이라지만 그 당시에 현금으로 20불을 받았으니 적은 것도 아니었다. (한인 카페는 14불을 주고 나를 고용했었으니) 호주는 주급이라 며칠만 일해도 따박 따박 쥐어주는 돈을 모으는 게 재미있었다. 돈 맛을 느낀 나는 조금 더 욕심내기 시작했다. 이제 카페일도 적응했겠다, 투잡을 시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상하게도 한번 일이 풀리기 시작하니 모든일이 한꺼번에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고급진 한식 레스토랑에서 사람을 구하고 있었고, 한인 레스토랑 치고 높은 시급과 손님들도 다 현지인들, 멋진 인테리어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이력서를 냈고 면접 전화가 왔다.
한인 레스토랑은 절대 가지 않겠다는 나였지만 높은 시급이 나를 꼭 존중해 줄 것 같은 느낌이었다. 20불이나 쥐어주는 데는 없었기 때문에 더욱더 하고 싶었다. 면접을 보니 여긴 한국인이 거의 오지 않고 현지인이 90% 이상이 온다고 했다. 그러니 영어는 어느 정도 해야 되고, 음식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된다고.
무조건 하고 싶은 곳이었다. 곳곳의 인테리어가, 음식 메뉴가, 분위기가 나를 한껏 상기시켰고 행복해지는 기분이었다. 면접을 본 이후로 바로 투입되었다. 이곳은 주 4일 오후시간대 4시간 정도만 하면 되어서 카페일을 마치고 하거나 카페일이 없으면 오후만 나오면 될 일이었다. 어쩜 시간도 딱 맞는지 이 레스토랑이 본업이기엔 봉급이 좀 작지만 겸업을 하면 딱 좋을 포지션이었다.
그렇게 주 7일, 투잡을 뛰게 되었다. 너무 신이 났다. 주 7일이지만 어느 날은 4시간만 일하고 끝나고 많이 하면 10시간 정도였다. 그리고 주마다 1000불 이상이 주머니에 들어오면서 곧 부자가 될 것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때쯤엔 유튜브에 호주에서 주 7일 하며 사는 유튜버를 알게 되면서 나도 '잘'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일만 하는 건 아니었다. 가끔 오전근무가 없을 땐 친구랑 놀기도 했다. 한 번은 오전 일찍 블루마운틴을 갔다가 오후에 레스토랑으로 일까지 갔으니 돈 버는 게 피곤한지도 몰랐다. 그뿐만인가, 그 바쁜 와중에 남자친구를 만들기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나에게 온전히 쏟을 시간은 출, 퇴근할 때 걸어가면서 자연을 만끽하는 시간뿐이었다. (와중에 교통비 아끼겠다고 출퇴근을 1시간 40분씩 걸어 다니기까지 했다. 꼭 돈 때문만은 아닌 호주의 그 대자연이 내 피곤을 다 가져가는 것 같았다.)
주마다 1000불이 찍힐 때 많게는 1300불까지 받으면서, 내 몸이 망가져가는 걸 몰랐다. 정말 돈에 미쳐있었나 싶다. 결국 탈이 났다. 하혈을 하게 된 것이다. 원인을 보아하니, 피곤이 쌓이면서 몸이 그야말로 축나버린 것이다. 호르몬 내분비가 고장이 났다나, 나는 피를 정말 많이 쏟아붓게 되었다. 폭포처럼 피가 터져 나오고 애를 낳는 것 마냥 핏덩어리가 숭덩숭덩 떨어져 버리곤 했다.
응급실에 가게 되었다. 피를 많이 흘려서 걷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마치 80세 노인이 하루아침에 된 기분이었다. 그제야 정신이 차려졌다. 뭐가 그렇게 중요해서 몸을 혹사시키면서까지 일을 했나. 호주 병원에서 급히 처방해 준 호르몬제를 먹으니 금세 피가 멈췄다. 하지만 호주 병원 시스템은 나를 나을 때까지 케어해주지 않았다. 딱 7일분을 주더니 끝. 8일째 되는 날 다시 피를 쏟았으니 말이다.
피는 이전보다 더 나왔다. 너무 무서웠다. 오줌처럼 컨트롤도 되지 않아서 주르륵 흐르는 느낌이 온몸의 털을 서게 만들었다. 그동안 쏟은 피 때문인지 몇 걸음 떼는 것조차 어려웠다. 결국 친구를 호출하게 되었다. 절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친구는 나를 부축하고 우버를 불렀다.
우버가 오는 동안 앉아있었는데 우버가 와서 일어나자마자 나는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아찔했다. 정신은 이내 들긴 했지만 우버 기사는 내 상태를 보더니 그대로 얼음. 나를 못 태우겠단다. 너랑 괜히 엮여서 잘못되고 싶지 않다고. 나를 마약범 혹은 범죄자로 오해한 것이다. 친구는 그게 아니라 아파서 그렇다. 빨리 병원으로 가줘라. 했더니 그럼 엠뷸런스를 부르겠다는 것 아닌가.
호주는 엠뷸런스는 보험이 안되기도 하지만, 타자마자 70만 원 정도가 나온다고 들었다. 우린 극구 말렸다. 돈 얘기에 정신이 돌아온 나는 제발 믿어달라. 병원에 데려다 달라.라고 부탁했다. 우버 기사는 오해가 풀렸는지 나를 응급실로 데려다주었다.
응급실에 꼼짝없이 입원을 하게 되었다. 내가 죽을병이라도 걸린 것 같았다. 두 번째 응급실이라 검사를 진행해야 했다. 우리나라였음 응급실에 들어오자마자 검사를 진행했겠지만, 호주는 달랐다. 그렇게 10시간 이상 아니 하루를 기다렸다. 고작 초음파와 오줌검사를 하려고. 그때만큼 한국 의료시스템이 얼마나 대단한지, 의료진분들의 노고가 얼마나 감사한지 깨달은 날이 또 있을까.
이전과 똑같은 약을 탔고 검사결과 별다른 병을 찾진 못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자궁도 오줌 결과도 다 정상. 근데 이제 이 약이 끊어지면 또 피를 흘릴게 뻔하니 더 이상 호주에 못 있겠었다. 내가 사랑한 호주는 사랑했'던' 호주로 바뀌었고 거리를 거닐다 피를 흘리는 상상에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나는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