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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파도 Jul 04. 2024

안과 밖

회복실

수술실이 의료진의 영역이라면

회복실은 환자와 보호자의 영역이다.

마취에서 깨어나 의식을 되찾고,

보호자의 이름을 부르기까지의

짧고 아주 긴 여정.

분명한 건 회복실 안과 밖의 위치선정과 별개로

그 여정은 웬만하면 평생 각인된다.    

 

나의 안의 경험은 라섹수술 하던 고작 몇 분밖에

없기에 밖의 이야기를 해보자면

간단한 설명을 들은 후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하며

얼어붙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 싸인은 아주 외로운 무게감과 인간이

 갚지 못할 부채를 담보로 하기에 그렇다.

신이 아니고서야 결코 장담 못할 부분을, 가족이라는 이유만도 아니라

동의하지 않으면 다운로딩 자체가 안 되는

프로그램처럼.  

동의가 되지 않으면 수술진행이 안되기에

그냥 해야만 하는 싸인.     


싸인부터 수술실 배웅까지 무덤덤한 연기는 가까스로 할 수 있고, 가능하다.

수술 대기실에서는 의외로 태어나서 한 두 번 (수술날짜 잡을 때 와 수술동의서 사인 받기 전 설명 들을 때) 뵌 게 다 인 의사 선생님의 실력을 간절히 믿으며

꽤 희망적이다.

의술과  내 염원과 환자의 희망이 블루투스로

연결된 듯 믿음 안에서 그래도 괜찮다.      


그다음이 서늘하다.

마라톤 완주가 코 앞인 것 같은데...

결승선이 보이지도 않고 음소거된 상황처럼.  

수술이 잘됐다고 피곤하지만 , 밝은 표정으로 나오는 의사 선생님을 봤는데도 한참을 기다려도

엄마는 나오지 않을 때 수술결과와 전혀 상관없다는 듯 엄마가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계실 때 의

회복의 시간.

혹여 부정이라도 탈까 생각도, 두려움도 막아내며

오직 할 수 있는 건 어디서부터 해야 되는지

시작점을 모르는 회개뿐이다.

정지된 시간이 어떻게든 흐르고 드디어 의식을 찾은 엄마를 마주하게 되었을 때,

엄마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너무나 차가운 엄마의 손과 발이 나를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한다.

차다. 너무 차다. 얼마나 추우셨을까?

형용할 수 없는 사투의 흔적을 차가움으로 느낀 후,

두세 번의 크고 작은 수술 뒤 회복실에서 나온 엄마를

보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손과 발을 만지고, 주무르고,

녹이는 일이다.

수술실이 그런 곳인가 보다.

몇 시간 을 수술을 받고 회복실에서 두어 시간을 보냈는데도  꽁꽁 언 몸으로 나오게 되는 곳.

얼어붙었던 공간.           

재밌는 건 상황의 비장함과 별개로 회복실에서 입원실로 옮겨지고, 수술 후 몇 시간 동안 지켜야 할 주의사항을 간호사에게 듣고 메모하는 정신없는 와중에 엄마에게 꼭 듣게 되는 말이 있다.

“밥은 먹었냐?”

수술실 ->회복실->입원실 거의 냉동상태로 정신없는 방 바꾸기 중에도

꼭 어이없는 질문을 하는 존재가 ‘엄마’다.      


생과 사 중 생을 위해 꼭 통과해야 하는 통로의 끝 지점.

마라톤의 사 점 구간처럼 나에겐 회복실 대기시간이 가장 힘들다.

올해 3월 수술 이후 4개월이 지났지만 엄마의 회복은 더디고, 일상으로의 복귀가 아닌

회복 중 이시다.       


안과 밖의 시간을 보냈을, 보내고 있을

다른 이들에게도

괜찮다. 괜찮다. 회복된다.

회복 ((回復·恢復) 이란 말 자체가 원래의 상태를 돌이키거나  원래의 상태를 되찾음 이란 뜻이기에

회복실에서부터 일상의 진짜 회복까지.

돌아갈 수밖에 없다.


미숙한 마라톤 갤러리의 소리 없고, 아주 긴 응원을

안과 밖에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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