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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Dec 29. 2022

오늘도 평화로운 당근 나라

당근나라할머니

안녕하세요 혹시 당근이세요?



멋쩍다. 상대방도 놀랐을 것 같다. 내 나이의 할머니들은 손주 손녀의 선물을 사러 백화점에 가지만 나는 당근 애용자다. 윈도가 나오기 전, 흑백 도스 운영체제에서 전화선으로 연결하는 pc통신으로, 컴퓨터를 시작했다.  천리안 나우누리 유니텔에서, 총천연색 컬러 인터넷환경으로 바뀌는 것을 지켜보고 맞이한 나였다.  코로나 이전에도 생필품을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중고거래는  중고나라(중나)로 입문했다. 주로 아이의 책을 구입하거나 정리하는 용도였다. 속절없이  사기를 당하고 나서  당근으로 옮겼다.

 

 4년 전 '아이에게 영어 영상을 더 재미있게 보여주는 방법은 없을까' 궁리 끝에  빔프로젝트를 사기로 했다. 비어있는 흰색 벽에 빔을 쏘아, 큰 화면으로 영상을 보여주는 생각만 해도 근사했다.  후기가 좋고 가격대도 적당한 엘지시네빔을 사기로 결정했다. 당시 중나에서 엘지 시네 빔은 인기기종이라 나오면 바로 팔렸다. 여러 번 놓치고 드디어 맘에 드는 물건을 샀다. 아니, 산 줄 알았다. 판매자와  문자로 대화를 나누고 입금을 하였다.  3시에 입금하고 5시에 보니 게시글이 사라졌다. "게시글을 내리셨어요?" 묻는 문자에 판매자는  답이 없었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검색을 해보고 그날 나와 같은 피해자가 많다는 것을 알았다. 전문사기단이 중나회원의 아이디를 해킹하여 인기 있는 물건을 골라 판매하고 돈을 갈취한 수법이라고 했다. 피해자들끼리 카톡방을 만들었는데 사기꾼의 이름과 상품명, 액수를 아이디로 사용했다. 내 아이디는 김철우/엘지시네빔/ 435.000이었다. 다음날 카톡방 중론에 따라 사이버수사대에 신고를 하고, 관할 검찰청으로 달려가 접수했다. 접수하고 돌아오는 길에 허기가 져서 종일 굶었음을 깨달았다. 식당을 들어갔다. 법원과 검찰청 근처 식당이 맛이 훌륭하고 가격도 합리적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가끔 그날 먹은 늦은 점심특선이 생각나는데 다시 가지는 못했다.


 일주일 뒤  사건이 서울 동부 지방 검찰청에서 서울 중앙 지방 검찰청으로 이송된다 연락이 오고  경찰서 사이버 담당 수사관이 우편으로 진술서를 보내니 회신을 해달라고 했다. 한 달 뒤 '사기꾼을 검거했다'는 연락이 왔다.  범인은 잡았지만  '사용한 폰이 대포폰이고  송금한 신한은행통장도 확인할 수 없는 통장'이라고 한다. 헉뭐라카노미친거아이가  실명이 아니면 통장 개설도 하지 못하는 것이 대한민국 금융실명제 아니던가. 범죄자들은 법 위에 진화해서 살고 있는 건가. '결국 내 돈은 찾지 못하겠구나' 하는 느낌이 싸하게 왔다.  두 달 뒤 경찰서에서는 '사건을 서울 중앙 지방 검찰청에 송치하는 것으로 종결한다'는 문서를 보내왔다. 문서의 하단에는 범죄피해자 권리 및 지원제도가 적혀있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쉴 새 없이 울리는 피해자 단톡방에서도  나왔다.

  

 이제 더 이상  중고거래는 하지 않겠다.

 


그때 당근이 보였다. 원조인 중고나라를 뛰어넘어 한국인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중고거래 앱이라고 했다.

그동안 당근 마켓 이름은 들었으나 별 감흥이 없었다. 큰 마켓을 이용하다가 동네 구멍가게를 보는 느낌이랄까.  사람들이 중나에서 당근으로 가는 제일 큰 이유가 같은 동네 인증을 한 이용자끼리 거래가 이루어지고 구매자의 후기를 보고 판매자의 매너를 판단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대단지 아파트인 경우에는 같은 아파트 주민끼리의 거래가 자주 일어나는 것이 최대 장점이다. 나도 거래할 때  같은 아파트 사람을 우선순위에 둔다.  입금하고 문 앞에 두면 찾아오는 '문고리 거래'도 썩 마음에 든다.


아이가 해리포터를 읽겠단다. 그동안 여러 번 지나가는 말처럼 권했으나 관심 없던 책인데 역시  모든 일에는 때가 있음을 느낀다.  판매글 중에서 몇 개를 추린다. 글을 보고 있는 사이에 새로 판매글이 올라왔다. 해리포터 중고책은 권당 오천 원이 일반적인 가격인데 아홉 권 만원에 올라왔다. 나이스 타이밍. 빠르게 책사진을 스캔했다. 심지어 새책같이 깨끗하다. 판매자 설명에 세월감은 있지만 사용감은 전혀 없다고 한다. 마음이 급해진다. 이건 사야 한다. 빠르게 "거래 원합니다" 적어놓고 답을 기다린다. 10분이 지나도 답이 없다. 놓쳤나더서둘렀어야했나. 오뉴월  땡볕 5분은 백만 대군 빤쭈를 말리고, 10분이면 월드컵축구의 우승국이 몇 번 바뀌는 시간이다. 한번더글을넣어야하나 답이 왔다. "네 가능합니다." 책 상태에 대해 더 물어보고 직거래 장소를 정하고 만났다. 당근 서로의 얼굴을 모른다. 책인 듯 종이백을 드신 분이 보인다.  


 저, 당근

 네, 해리포터



좀 오래되긴 했으나 새책을 싼 가격에 판매하시니 고마움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다. 허브캔디를 챙겨 왔어야 하는데 미처 생각을 못하고 그냥 왔다. 다른 방법이 없다. 고개를 숙일 수 있는 한 깊이 숙인 폴더인사로 고마움을 전한다. 책을 거실에 펼쳐놓고 하나씩 닦았다. 몇 년 전 아이의 책을 싸게 판매하면서 세이펜까지 끼어서 간 적이 있다. 쓰려고 보니까 없어서 비로소 알았다. 마음으로 '잘 쓰시라' 하고 말았다. 그분도 이렇게 고마운 마음이었으리라.


아이의 스키복을 당근으로 구입했다.  작년에 입히던 스키복이 작아져 구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한파로 마음이 급해졌다. 눈이 오면 무조건 뛰쳐나가 뒹구는 초딩에게  스키복은 필수다. 당근에서 하트를 보내 놓은 스키복들을 찬찬히 살펴본다. 마음에 드는 게시글에 일단 하트를 살며시 보내 놓는 것은  일종의 즐겨찾기이다. 새 상품에 색상과 품질, 가격도 적당하다. 이제 더 기다리고 있을 여유가 없다고 판단해 판매자와 채팅을 했다. 인사 후 아이의 키와 몸무게를 말하고  2년 이상  입히는게 가능한지 물어본다. 제조사에 따라  사이즈 편차가 있다.  긍정적인 대답을 듣고 직거래 장소와 계좌를 물어본다. 현금보다는 입금하고 만나는 것이 편하다. 한번 거래했던 사람을 만나기도 하는데  판매자분이 먼저 인사를 했다. "전에 참고서와 문제집을 사 가신분이시네요". 반갑게 인사하면서 본인은 아이가 사놓고 안 써서 판매했는데 잘 썼는지 궁금해하신다. "네 잘 썼어요. 제가요"


같은 지역이라도  이동이 불편한 곳이 있다. 미모의 60대 여인에게는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르는데  운전도 그중 하나이다. 걱정할 것은 없다.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리게 마련이다. 반갑고 정다운 인사가 오고 간 뒤에 택배비 포함해서 받으시면 안 되겠냐는 흥정을 다.  탁배비 반반씩 부담하는 것으로 거래가 성사되었다. 물건의 부피가 작고 급하지 않을 때는 편의점끼리 배송하는 반값 택배  선호하지만 지금은 당장 눈이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은 날씨니,  잘 못 걸리면 1주일이  넘어가는 반값 택배는 위험하다. 이럴 때는 다음날이면 집 앞에 와 있는 우체국 택배가 최고다.  스키복이 왔다. 색상과 사이즈  품질 다 마음에 든다.


이제 눈이 두렵지 않다.


여기는 눈이 와도 평화로운 당근 나라.



출처 : 내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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