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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관 Oct 20. 2022

불쾌한 '섹스'

이병헌 감독 <스물> 비평


스물 (2015)


 대한민국 청춘들을 다룬 청춘 영화와 드라마는 <족구왕>, <미생>, <파수꾼> 등 수도 없이 많다. 청춘이라는 단어를 생각했을 때 사람들은 새콤달콤한 사랑 이야기와 지치지 않는 젊음, 푸르른 봄을 떠올린다. 그러나 대한민국 대부분 청춘 미디어 콘텐츠 속에는 입시, 취업 준비, 비정규직과 같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문제와 고난이 담겨 있어 마냥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스물>은 청춘 장르 콘텐츠의 고정된 프레임을 깨부수는 선택을 했다. 사랑, 이성에 대한 호기심, 가족 관계, 성 등 갓 20살들의 보편적인 고민을 담아냈다. <스물>에서 김우빈은 술을 마시다 이런 말을 한다. “청춘 영화들 보면 자살, 낙태, 마약 같은 이야기가 하나씩은 나와. 그런데 우린 뭐가 너무 없어.” 스물이 되면 달라질 거라며 성인이 될 날만을 기대하다 20살이 된 청년들의 마음을 대신한 대사가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영화 <스물>은 무겁지 않고 밝은 코미디 영화로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몇몇 평론가들과 대중들에게는 밝은 코미디 영화로 다가가지 못했다.     


 씨네 21의 10점 만점 중 4.5라는 낮은 별점과 이병헌 감독을 화나게 했던 박평식 평론가의 “인간과 시대에 대한 무례와 무지”라는 평가. 그 외에도 ‘진부하고, 모욕적인 여성 캐릭터 사용’, ‘범죄 미화’, ‘잘못된 성적 욕구의 표현’ 등 신랄한 비판이 이어졌다. 이러한 평가들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다. 평가란 상대적이기에 사람마다 느끼는 점이 다를뿐더러 나 또한 <스물>을 보면서 몇몇 장면에서 의아하고 불쾌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중립을 떠나 감독을 폄하할 정도란 말인가.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 19세기 다윈은 ‘생존에 적합한 개체가 생존과 번식에 이익을 본다’는 자신의 자연선택론과 정반대인 현상에 대해 고민했다. 사슴의 뿔, 공작의 깃털, 사자의 갈기 등과 같은 장식들이 포식자들에게 노출돼 죽임을 당할 가능성이 커질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성의 니즈, 번식 상의 이득에 주목하면서 성 선택 이론을 정립하게 됐고, 성 선택 이론은 현대까지 전해지며 지금의 진화심리학으로 재탄생했다. 진화심리학은 모든 생명체의 활동은 생존과 번식을 목적으로 두고 있으며 모든 활동의 저변에는 생존과 번식이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 인간의 모든 활동에서도 위와 같은 근원을 두고 있으므로 보는 사람들을 다소 불편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는 <욕망의 진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의 짝짓기에 대해 내가 발견한 사실들 대다수는 윤리적이라 볼 수 없다. 그러나 어떤 발견이 불쾌하다고 해서 그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궁극적으로 인간 짝짓기의 불순한 측면으로 인해 생기는 가혹한 결과들을 치유하고자 한다면 그들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난 데이비드 버스처럼 가혹한 결과들을 치유한다는 거창한 목표는 없다. 다만 러닝타임 2시간 내내 섹스를 외쳐대는 20살 청년들의 이야기를 불쾌하다고 외면하지 않고, 다양한 시각과 관점을 통해 다가가 보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불쾌한 영화에 불쾌한 학문.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영화 <스물>은 왜 불쾌할까? 평론가들이 수없이 말한 단점들이 있지만 내가 느낀 불쾌함의 이유는 간단하게 단어이다. 영화를 가득 채운 단어들. 섹스, 자위, 성기의 이름 등 들을 때뿐만 아니라 단어들을 적고 있는 나 또한 몹시 부끄럽다. 이 단어들에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교수님, 부모님, 그 외 어르신에게 자연스레 말할 대한민국 사람은 정말 거의 없을 것이다. 외설적인 단어에는 거부감이 따라온다. 그 이유는 인식에 있다. 인식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모두 다르며 환경, 교육, 관계에 의해 만들어진다. 특히 대한민국은 과거에서부터 유교 사상을 받아들였으므로 외설적인 단어는 불쾌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아 큰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우물 안 개구리에 지나지 않는다. 인식은 새로운 것을 볼 수 있는, 알 수 있는 도구라 일컬어진다. 세상은 자신이 아는 만큼 존재한다. 우리가 모르는 세상은 볼 수도, 알 수도 없어서 알고 있는 것을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새로운 인식을 통해 자신의 세상을 넓힐수록 더욱 다양한 시각에 눈을 뜨게 되며, 우물 안의 개구리도 우물을 벗어날 수 있다. 진화심리학이라는 새로운 인식에서 섹스, 자위, 성기의 이름과 같은 외설적인 단어들은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모든 활동의 근원을 진화(생존과 번식)의 초점으로 보기 때문에 근원의 가장 가까운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영화 <스물>은 그저 인간의 본능, 욕구, 진화를 한 차례의 여과 없이 있는 그대로 선사한 것이다. 만약 진화심리학자가 

<스물>을 봤다면 감탄을 자아내며 즐겁게 보지 않았을까 감히 예상해본다.    

  

 이종현 교수님이 쓰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비평, <그 시절, 그 사람을 위로하는 판타지 미학>의 첫마디가 떠오른다. “영화는 판타지다.” 교수님의 말씀처럼 현실에서는 볼 수 없고 일어나지 않을 장면들을 보여주는 것이 영화이다. <스물>도 그러하다. 짝사랑하는 소녀의 가슴을 만진다거나 느닷없이 네 엉덩이에 비비고 싶다는 말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 만약 이성에게 위와 같은 행동을 한다면, 슬기로운 감빵 생활을 무료로 직접 체험해볼 수 있을 것이다. 진화심리학의 말대로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 생존과 번식에서 오며, 모두가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이성(理性)과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을 알기에 선을 넘지 않는다. 범죄 영화를 보고 범죄를 계획하진 않는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초능력이 발동되는 주인공을 보고 목숨을 내던지진 않는다. 그저 스크린을 통해 욕망을 해소하고, 판타지적 욕구를 채우는 것일 뿐이다. <스물>은 스크린을 통해 이성(理性)과 의지라는 제약을 벗어던지고, 인간의 원초적 본능과 근원이라는 판타지적 욕구에 충실한 영화였을 뿐이다.     


 현 사회에선 다소 무거운 주제일 수 있으나 가벼운 코미디 장르와 만나 300만이라는 괜찮은 흥행 성적을 냈다. 그렇다고 <스물>이 호평을 받아 별점을 9점 이상 받아야 한다거나 상영관 1위를 해야 하는 명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평론가들과 몇몇 대중들에게 받은 비난도 어느 정도 예견된 평가이다. 그러나 자신이 너무 굳어버린 인식으로, 틀에 박힌 관점으로 영화를 바라보진 않았는지. 한 번쯤은 돌아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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