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오늘도 거리를 무작정 걷는다. 운동삼아 걷는 것고 아니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기 위해 걷는 것고 아니다. 그냥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안절부절, 무얼 어떻게 해야할 지를 몰라 걷는 것이다. 나도 편안하게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싶지만 내 안의 불안은 나를 그냥 두지 않는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면 길에서 담배피는 고딩들, 고딩들 한테 삥뜯기는 중딩들 등 못 볼 꼴도 많이 보기에 왠만하면 고개를 푹 숙이고 걷는다. 괜히 눈 이라도 마주쳤다가 험한꼴을 당할 수도 있다. 오늘도 무슨 바쁜 일이라도 있는 양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어느 숙녀가 몰고 가는 자전거와 부딛혔다. 자전거 앞바구니에는 피아노 악보가 가득했는데 그게 다 와르르 쏟아져 버렸다. ‘아 죄송해요’하고 쏟아진 악보들을 주섬주섬 집어들고 있으니 ‘아니에요 제가 죄송해요. 어디 안다치셨어요?’라는 그녀. 땅 바닥만 쳐다보며 있다가 어디 안다쳤냐는 그녀의 물음에 그만 머리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말았다. 보지 말았어야 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어쩌자고 그런 미녀의 얼굴을 쳐다 보았단 말인가?‘아,,,네, 괜찮습니다. 저는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악보를 대충 챙겨 주고 얼른 자리를 뜨려는데 자전거가 움직이는 기척이 들리지 않는다. 보니깐 나랑 부딛히며 체인이 풀린 모양이다. 자전거가 꼼짝을 안하고 있고 여자는 어쩔 줄 몰라 한다. 후~ 나한테 왜 이런 일들이 자꾸 생긴단 말인가? ‘제가 좀 봐드릴까요?’’폐가 안된다면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어쩔 수 없이 자전거를 봐주고 체인을 넣어 주었다. ‘이제 움직일 수 있을 거예요.’‘아, 네, 너무 감사해요. 근데 아까부터 그 무릎,,,’얼굴을 붉게 찌푸리며 가리키는 그녀의 손끝을 따라가 보니 피가 철철 흐르는 내 무릎. ‘아 괜찮습니다.’‘괜찮긴요, 저땜에 많이 다치셨는데, 게다가 자전거 까지 고쳐 주시고… 병원은 안 가봐도 되겠어요?’‘병원은요. 그냥 빨간약이나 좀 바르면 됩니다.’‘그럼 아직 저녁 전이시면 제가 저녁이라도 대접하게 해주세요. 제 맘이 편칠 않아서 그래요.’ 이거 일이 커졌다. 난 혼자서도 어찌할 바를 몰라 불안에 떨며 매일 걸어야 하는 사람인데, 이런 미녀와 같이 앉아서 식사를??? 오 신이시여, 어찌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아 신경쓰지 마세요,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가던 길 가시지요. 저도 제 가던 길 가겠습니다.’그렇게 일부러 더 냉정하게 말하고 나는 다시 땅바닥을 응시하는 특유의 폼으로 걷기 시작했다. 근데, 자꾸 그 자전거가 따라오는 것이다. 뒤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최대한 속도를 내서 걸어도 그 자전거는 떨어져 나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난 멈취서서 돌아섰다. 그 자전거도 멈췄다. ‘식사만 한끼 대접하게 해주세요. 제가 너무 죄송해서 그래요’‘네 알겠습니다. 그럼 밥만 먹고 가는 겁니다?’ 그제야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내 옆에 다가 섰다. 이런 이건 무슨 모양새냐? 여튼 둘은 가까운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파스타를 먹었다. 먹는 내내 여자는 연신 자기에 대해 소개를 했는데 솔직히 내 귀에는 하나도 안 들어오고, 이 불편하고 불안한 상황을 빨리 벗어나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다리를 계속 떨며 파스타를 흡입하던 나는 그녀가 뭔가를 얘기하고 있는 중간에 말을 끊고,‘다 드셨으면 이제 그만 가실까요?’라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처음으로 불쾌한 기색을 보이며 말한다.‘참 무례하시군요. 솔직히 제가 하는 말 하나도 안들으셨죠? 게다가 자기가 다 먹었다고 그냥 가자구요? 좀 특이한 분인 것 같긴 하지만 이건 너무 무례하신데요?’‘죄송합니다. 사실은 제가, 그러니까 제가 사실은 사정이 좀 있는데, 그게 그러니까, 제가 그러니까,,,’그녀는 두 눈을 집중해서 나의 입을 응시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꼭 들어야 겠다는 듯이.
‘후~ 그러니까,,, 제가 사람을 대하는데 좀 문제가 있어요. 혼자 있어도 불안하고 사람을 대하고 있으면 더 불안하고,,, 이해를 못하시겠지만,,, 여튼,,, 그래요…’‘아~’그녀는 뭔가를 이제야 알겠다는 듯 외마디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시군요. 제가 실례가 많았네요. 그럼 오늘 가시던 길 잘 가시구요. 언제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죠.’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후~ 이제야 벗어났다. 그 공포스런, 사람을 대해야 하는 상황을 벗어났다. 그럼, 이제 다시 불안하다. 빨리 다시 걸어야 한다. 나는 다시 걸었다. 딱히 목적지도 없지만 그냥 걸었다. 집에 갈 시간이 되어 집으로 갔다. ’너는 도대체 어디를 맨날,,,‘엄마의 잔소리를 뒤로 하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내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덜덜 떨고 있으니 오늘 그녀와의 일이 생각난다. 나 같은 병신이 평생 만날까 말까한 미인과 저녁 식사를 같이 했다. 일생일대의 사건이다. 아마도 다시는, 그런 미녀와 저녁식사는 커녕 말 한마디 나눌 기회도 없을 것이다. 그런 기회를 그렇게 날릴 수 밖에 없는 나의 병신스러움이 오늘 따라 원망스럽다. 뭐 어쩌겠는가, 나 하나 살아있음을 감당하지 못하는 병신인 것을. 아쉬워할 자격조차 없는 나이기에 그냥 평소처럼 약 털어넣고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다음 날도 아침 일찍 걸어 나왔다. 걸어 나와서 계속 걸었다. 어디든 발 닿는대로 걸으니 나도 모르게 어제 그녀와 부딛혔던 곳으로 왔다. 아! 왜 여기로 왔을까? 얼른 방향을 돌려 한참을 걸었는데, 누군가 옆에 와서 붙는 것이다. 옆에는 자전거를 끌고. 그녀였다. ’아~‘그는 거의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아, 안녕하세요. 제가 오늘 여기 온 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러니까, 그러니까,,,‘’아, 네 저도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온 건 아니예요. 제 등하교 길이라 시간만 잘 맞추시면 거의 매일 절 만나실 수 있어요.‘’아,,,네,,,저,,,그러니깐 저는 그 쪽을 만나려고 온 건 아니고, 그러니깐,,,‘’아~네~네~ 잘 알았아요. 절 만나러 오신게 아니라는거. 꼭 명심 할게요. 근데 부탁이 있어요,’‘그게,,,뭐죠?’‘어제는 제가 밥 샀으니깐 오늘은 그쪽이 밥 사요. 우리 학교 학식이 꽤 괜찮거든요. ’아,,,네,,, 밥은 얼마든지,,, 아 그게 그 말이 아니고 그러니깐…‘’아~네~잘 알았습니다요~‘
그렇게 해서 둘은 학교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먹었다. 그녀는 항상 점심은 학식을 먹는데, 그녀가 누구랑 무엇을 먹는지가 항상 소문이 되고 뉴스가 되는, 그녀는 그런 존재였다. 밥 한번만 같이 먹어 달라고 줄선 남자가 운동장 몇바퀴를 돌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그런 그녀가 오늘, 정체불명의 다리 떠는 남자와 점심을 같이 먹고 있다. 그것도 아주 즐겁고 유쾌하게, 조잘거리며. 그 소문은 학교에 금방 퍼졌고 곧 뉴스거리가 됐을 뿐 아니라 그녀가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둥 남자친구를 학교 구내식당에 까지 데리고 왔다는 둥 별의 별 헛소문을 낳았다.
나는 오늘도 식사를 빨리 마치고 나가서 걸으려는데, 뭔가가 걸렸다.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가기가 싫어진 것이다. 내 인생 최초로 누군가와 같이 있고 싶어진 것이다. 나는 덜덜 떨면서 물었다. ’호,,,혹시 괜찮으시면,,, 어디,,, 가서,,, 커피라도…‘’흠, 당연하지요. 제가 밥 얻어먹고 커피도 안 살 사람으로 보였어요?‘라며 그녀는 매우 쾌활하게 앞장섰다. 식당 근처 자판기에서 커피 두 잔을 뽑아 운동장을 천천히 산책하며 마셨다. 매일을 어딘가를 걸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걸었지만, 이렇게 여유롭고도 편한 마음으로 걸어본 적이 있었던가? 그렇게 둘은 종이 커피잔을 들고 운동장을 활보했다. 이건 그녀에게는 그냥 남자친구 있다고 학교에 공표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많은 교내 남자들이 눈물을 흘릴지, 그런 건 난 생각도 못했다.
’저 그럼, 오늘도 이만,,,가,,,가보겠습니다. 자전거 조심히 타십시오.‘그렇게 인사를 건네고 나는 얼른 교문을 나왔다. 자전거 조심히 타라니, 세상에 할 말이 그렇게나 없었단 말이냐? 아! 이 병신은 기회가 와도 잡을 줄을 모른다.‘
집에 왔다. 불안하다. 뭘 어찌해야 모르겠다. 미칠 것 같다. 살아 있는 것을 견디기가 힘든다. 그런데, 이제 그럴때 생각나는 사람이 생겼고, 잡고싶은 손이 생겼다. 그러나 그럴 수록 불안은 더 커져갔다. 그냥 막연하고 불안 그 자체였던 불안에 고통받아온 나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불안, 즉 무언가가 없슴으로 인한 불안을 맞이할 생각을 하니 그 자체로 더욱 불안해 졌던 것이다.
다음 날, 용기를 내어 또 거기를 찾았다. 그리고 또 그녀를 만났다. 같이 밥을 먹었다. 같이 커피를 마셨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나는 그녀를 만났다. 그리고 젖먹던 용기까지 쥐어 짜서 물어봤다. ’저,,,저 이상한 사람 아니구요,,,그러니까 그냥 순전히 여쭈어 보는 것일 뿐이예요… 저 혹시 손 한번 잡아볼 수 있을 까요? 저저절대 싫으시면 안 잡으셔도,,,‘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그녀는 나의 손을 잡고 있었다. 내 얼굴을 스윽 올려다 보며 ’이렇게요?‘라고 물었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둘은 학교 교정을 꽤 오래 걸었다. 학교는 발칵 뒤집어졌다.
나는 집에 왔다. 이상하게 매일을 악마같이 괴롭히던 불안이 없어진 듯하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종류의 불안, 즉 그녀가 없으면 어떡하나 하는 등의 생각으로 나의 불안이 채워져 나갔다.
어느날 그녀를 만나 물어봤다. 내가 이상하지 않냐고. 왜 나같은 사람과 밥먹고 차마시고, 손까지 잡아 주냐고 물어봤다.
’당신의 불안한 눈동자가 무척이나 순수해 보였기 때문예요. 날 욕망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구요.‘’저도 그 쪽을 욕망하는 건지도 몰라요. 당신의 손을 잡고 영원히 이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그런건 괜찮아요. 얼마든지 욕망하세요. 그 대상이 되어 드릴게요. 이 순수하고 불안한 아저씨야.‘
그 이후 둘은 항상 손을 잡고 다닌다. 이제 그의 전반적이고 절대적인 불안은 많이 호전되었다. 다만 그녀가 손을 놓으면 어쩌나 하는 단 한가지 불안만은 그의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