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영화의 미학적, 윤리적 태도에 관한 고찰

2021년 7월 27일의 글

by 육육삼의 삼삼칠

전쟁영화는 어느새 블록버스터를 만들 때 사용하는 하나의 커다란 예시가 되었다. 수많은 특수효과와 인력이 투입되는 프로젝트이자 매번 정치적인 담론을 형성하게 만드는 소스가 되는 분야이다. 이동진 평론가는 전쟁영화에 대해 "최고의 전쟁영화는 결국 반전(反戰) 영화가 될 수밖에 없다."라는 말을 남긴 바 있다. 보다 회의적으로, 누벨바그를 상징하는 감독 프랑소와 트뤼포는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감독의 손을 떠난 후엔 통제가 불가하기 때문에 설령 감독의 의도가 반전을 지향한다 할지라도 관객에게 전쟁에 대한 은밀한 환상과 흥분을 심어줄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라는 의견을 내비친 바 있다.


전쟁영화를 만드는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일차적인 목표는 특정한 사건과 특정한 인물을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관객이 전쟁영화를 극장에서 관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재명 작가의 [20세기 전쟁영화가 남긴 메시지]라는 저서에선 다음과 같은 표현을 들고 있다. “돈을 내고 전쟁영화를 보는 우리의 심리 속에는 언제라도 죽음의 가능성이 큰 전쟁의 위험한 상황에서 비켜나 영화라는 가상공간을 통해 전쟁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안도감이 깔려있다."


고민되는 표현이다. 모든 이들이 전쟁영화를 볼 때 단지 오락적 쾌감만을 챙기기 위해 극장으로 향하는 것이라 치부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분명 전쟁영화에서 보여주는 스펙터클한 전투의 장면들은 그 자체로 나를 포함한 관객들에게 은밀한 매혹의 감정을 조달하는 기능을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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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또한 영화라는 매체에서 완벽한 반전(反戰)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는지에 관해선 의문이 남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전쟁영화는 최우선적으로 반전이라는 주제를 지향하는 태도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스펙터클과 카타르시스의 체험을 위해 전쟁영화를 감상해서는 안 되며, 감독은 스펙터클을 지향해 관객을 미혹시켜서는 안 되며, 전쟁영화는 스펙터클의 장(場)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특정한 사상을 주입하는 선전의 도구로 전쟁영화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본 글에선 유명한 몇 편의 전쟁영화를 예시로 들어, 전쟁영화가 미학적인 면이나 윤리적인 면에 있어 담론의 여지가 생겨나는 경우를 짚어보는 것을 주 내용으로 삼는다. 제목엔 거창하게 고찰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그저 몇 개의 전쟁영화를 보고 난 후의 나의 생각을 늘어놓은 것일 뿐이다. 다만 이를 통해 전쟁영화라는 포맷이 지향하고 지양해야 할 태도는 과연 무엇일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글을 작성한다.



잘 만든 영화가 좋은 영화일까? 물론 그렇긴 하다. 무슨 이런 질문이 있나 싶겠지만 일부의 경우 한 영화의 높은 미적 완성도가 영화의 주요한 비판의 대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나의 경우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며 그러한 생각을 많이 했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분명 미적으로 탁월한 영화이다. 이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특히나 오프닝 시퀀스는 모든 전쟁영화를 통틀어 가장 완성도 높은 시퀀스였을 것이다. 여기서 나의 의문은 발생한다. 노르망디 해변에 상륙하는 장장 20여 분간의 오프닝 시퀀스를 마주했을 때 과연 관객들이 '압도적인 스케일의 스펙터클'이 제공하는 짜릿함에 도취되었던 것이 먼저인지, 다분히 장르적인 쾌감으로 이어질 수 있는 스펙터클이 느껴지기에 앞서 전장 그 자체의 참혹한 허무함을 먼저 느꼈었는지는 한번 고민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잘 만들어서 위험한 영화이다. 전쟁의 잔인성을 이야기한다는 목표에도 불구하고 장면 장면이 주는 탁월한 스펙터클이 되려 관객을 매혹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면 우리는 그러한 결과물을 전쟁영화의 윤리성이란 잣대를 들이댔을 때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 것일까.


두 번째로 걸리는 지점은, 이 영화의 그 탁월한 연출 때문에 이 영화의 주제를 손쉽게 넘어가고 싶지는 않다는 것에 있다. 이 영화의 연출이 너무나도 뛰어나기에 그 메시지를 복기해 볼 의지조차 없어지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라이언이라는 인물이 영화의 안팎을 감싸고 있는 액자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을 보며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영웅을 내세워 국가의 명령에 절대 충성할 것을 강요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주인공의 현재 모습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장면이나 밀러 대위의 사생활을 언급하는 장면에선 감정적인 낭비가 느껴지기도 했다.


1998년에 개봉한 이 영화 이후 5년 뒤 발발한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 간의 연관성을 고려했을 때, 이 영화가 "I WANT YOU FOR U.S ARMY"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기에 영화의 처음과 끝에 등장하는 성조기는 구조적으로도 사족처럼 느껴질 뿐만 아니라, 전쟁 영웅을 찬양하고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의 위엄을 드높이는 노골적인 프로파간다처럼도 보인다. 물론 수많은 전쟁 영웅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창작물에서, 특히나 전쟁을 다룬 예술에서 영웅 신화를 만들 때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이 영화가 영웅을 기억하려는 것인지 미국을 찬양하려는 것인지,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려는 것인지 전쟁을 찬양하려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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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영화가 주는 매혹적인 스펙터클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동시에 이를 기민하게 변주한 영화가 있다. 1979년에 개봉해 당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지옥의 묵시록>이다. <지옥의 묵시록>은 압도적인 스케일과 호방한 액션을 선보이며 관객을 '매혹적인 전장'으로 초대한 이후 그 공간의 광기를 여과 없이 비추어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태도에 대한 반성을 유도하는 형식을 사용하고 있다. 물론 그 형식에 있어 누가 봐도 폭력의 환상을 제공하는 초반부 학살 시퀀스는 그 의도가 어쨌건 간에 윤리적 논쟁에 휘말릴 수 있다. 영화의 감독인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위 장면을 언급하며 해당 장면이 폭력에 대한 욕망을 일으키기에 이 영화가 반전영화가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발퀴레의 기행]이 울려 퍼지며 민간인을 학살시키는 장면은 분명 영화가 주는 스펙터클의 쾌감이 잘 드러난 경우이기 때문이다.


극 중 커츠 대령을 묘하게 동경하는 감정을 품었던 윌러드 대위와 마찬가지로, 전쟁이 주는 막연한 오락성과 낭만성을 무의식 속에서 동경했던 관객들이 그러한 신기루야말로 이 광기 넘치는 부조리한 공간 속에서의 부산물에 불과했음을 스스로 마주하며 반성케 하는 방식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코폴라 스스로 이 영화는 반전영화가 아니라 밝혔음에도 역설적으로 어떤 반전을 표방하는 영화보다 탁월한 메시지를 선사해 준다.


여담으로 <지옥의 묵시록>은 현재까지 3가지의 버전이 존재한다. 이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사람에게 개인적인 추천을 한다면 153분 버전인 극장판을 추천한다. 프랑스 농가 장면들은 영화의 메시지를 한층 강화시켜주긴 하지만 다소 직설적인 형태가 아쉽기도 하거니와 영화 전반적으로 흐르는 '광기'의 리듬이 해당 시퀀스에서 급작스럽게 사그라드는 감이 있어 소위 김이 새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전쟁영화 역시 장르라는 자장 아래 있으며 그로 인한 장르적인 요소 또한 배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미 하나의 '장르'로 구분되는 것이 전쟁영화이지만 장르의 관습이 주는 오락적인 쾌감에 기대려 하지 않으면서도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어낸 영화들이 존재한다. 나의 경우, 이러한 측면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단연 <컴 앤 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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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컴 앤 씨>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는 이유가 있다. 이 영화는 어느새 전쟁영화의 미덕처럼 사용되는 '서스펜스'가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엔 시각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굉장히 잔인한 순간들이 있지만 다수의 장르영화에서 이를 위한 사전작업으로 사용하는 서스펜스는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영화 중반 주인공 남녀가 마을로 돌아왔을 때 주민들이 남아있지 않은 것을 보고 이들이 도망간 것으로 알고 있을 때 카메라는 주민들의 시체를 스쳐 지나가듯 비추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의 후반부, 광장으로 마을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은 뒤 헛간에 이들을 들여보내며 불과 총으로 모두를 학살하는 시퀀스 역시 장르적인 문법의 전개와는 거리가 멀다. 충격적인 학살의 장면들이 등장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영화는 마을 사람들이 과연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를 놓고 편의적인 시소게임을 벌이지 않는다. 주인공과 관객은 이 끔찍한 비극의 결과물이 어떻게 생겨날지 이미 짐작하고 있지만 이를 바꿀 수도 저항할 수도 없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철저하게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소년의 눈앞엔 죽음과 광기만이 가득할 뿐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장르의 자장 아래 있는 전쟁영화는 그 결과물 자체로서도 감독의 의도를 벗어나 전쟁에 대한 은밀한 환상을 심어줄 수 있기에 완벽한 반전영화는 불가능한 목표일지도 모른다. 이 불가능한 전제에서도 반전의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 영화는 필사적으로 마지막을 향해 달려간다.


영화의 마지막, 전쟁의 광기에 완전히 사로잡힌 주인공 소년이 히틀러의 사진을 향해 총알을 난사할 때 영화는 역재생을 통해 20세기 최악의 인물이었던 아돌프 히틀러의 역사를 반추한다. 영화는 끝까지 과거로 돌아가 기어코 유년 시절의 히틀러를 소환하기에 이르렀고, 이전까지 그가 행한 수많은 악행들 앞에 총알을 발사한 소년 역시 어린 히틀러의 사진 앞에선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다. 소년에 눈앞엔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 어린아이의 모습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영화가 가질 수 있는 간편한 장르적 쾌감에 기대려 하지 않고, 완벽한 반전영화라는 불가능한 목표를 위해 그 험난한 여정을 끝내 완주한 듯한 이 영화를 보며 나는 이 <컴 앤 씨>야말로 진정한 반전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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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개봉해 아카데미와 같은 유수의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경쟁을 벌였던 영화 <1917>은 그 형식적인 특징 등에서 수많은 담론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는 영화이다. <1917>의 촬영은 특별하다. 그러나 내 기준에서 이 경우는 과잉이다. 거대한 기술의 강박적 남용이 오히려 비순수성을 불러왔다고 생각한다.


<1917>은 기독교적 메타포가 가득한 영화다. 이름 없는 한 주인공의 처절한 여정 속에서 숭고함을 드러내려는 목적을 가지고 계획된 영화이다. 스코필드가 못으로 인해 손바닥에 상처를 입는 장면은 예수가 재림했을 때의 모티브가 분명하며, 영화 중반 블레이크가 사망할 때의 두 주인공의 구도는 명백한 '피에타'의 이미지다. 블레이크가 만나는 여성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 마리아를 연상케 하지 않던가. 영화 속에 수많은 메타포가 들어 있다 하여 영화를 평가하는 것을 달리 하고 싶진 않다. 문제는 <1917>이 담고 있는 숭고함과, 기교 가득한 연출의 방법이 서로 조응하지 않으며 서로 어깃장을 놓는다는 것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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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들의 여정은 처절한 반면 카메라는 '원 컨티뉴어스 숏'을 이어가기 위해 시공간을 유려하고 매끄럽게 유영한다. 인물과 카메라의 서로 다른 처지에서 비롯되는 기막힌 괴리는 짐짓 기만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스코필드가 철로를 아슬아슬하게 건널 때 카메라는 스코필드의 뒤와 옆을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스코필드에겐 위기가 닥치지만 카메라에겐 고난이 없다. 이 부분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핸드헬드의 적극적인 사용과 병사들의 뒤를 따르는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인해 처절하고 탁월한 리얼리티를 만들어냈지만 <1917>의 방법은 그것과는 다르지 않던가. 나는 도대체 <1917>의 카메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극에 사실성을 부과하기 위해 원 컨티뉴어스 숏을 사용했지만, 영화는 - 특히 블록버스터의 경우는 - 극의 형태를 띠기에 극적인 요소가 개입될 수밖에 없다. 스코필드의 여정에 관객들은 스스로가 '안전한 만큼'만 함께할 수 있다. 비단 이 영화뿐이 아닌 수많은 재난영화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로, 인물들이 어떤 위험에 빠지더라도 관객들은 완벽한 안전함 아래에서 스펙터클의 쾌감만을 즐길 수 있다. 이러한 부분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인물과 관객은 사각의 틀이라는 필연적인 장벽이 있다는 것이다. 현장감과 몰입감을 최대한으로 끌어내기 위한 원 컨티뉴어스 숏일지언정 그 한계는 분명 있다. 불가능한 목표를 향한 방법론은 되려 형식의 거추장스러움만 야기할 수 있다. <1917> 역시 하나의 영화일 뿐이다.


원 컨티뉴어스 숏으로 인해, 영화 속 사건의 배치도 의심스럽다. 만약 트럭으로 이동하는 부대가 '우연히' 스코필드에게 접근하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스코필드가 트럭을 얻어 타지 못했다면, 과연 스코필드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트럭을 얻어 타지 못한 채 홀로 걸어가야만 했던 스코필드의 여정엔 위기가 없었을까? 블레이크 대신 스코필드가 사망했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까? 혹여 주인공 일행이 독일군 진지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이들은 전투기도 마주하지 않고 트럭을 탄 부대도 만나지 않았을까? 이 모든 것이 이미 예정된 신의 뜻이었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놀랍도록 작위적이다.


거대한 기술이 넘실대는 성찬의 장으로 전쟁영화라는 포맷을 사용한 것에 대해 나는 과연 그것이 옳은 선택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이 지점들에서 발생하는 주제와 연출 간의 괴리를 느끼면서도 이 영화를 높게 평가하고 싶지 않다. <1917>은 분명 훌륭한 영상이다. 그러나 훌륭한 영화인진 나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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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술했던 <1917>과 유사하게, <사울의 아들>은 그 형식적인 면모에 있어 흥미로운 담론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영화이다. 스크린에 가득 담기는 1.85:1의 비스타비전 화면비가 아니며 스펙터클한 이미지를 제공하는 2.39:1의 시네마스코프 비율도 아닌, 이젠 그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아카데미 비율의 1.37:1의 화면비를 사용하는 영화이다. 왜일까.


전능한 관찰자의 시점에서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객관적으로' 재현해 전시한다면 이는 그들에 대한 또 하나의 시선의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수감자들의 시선은 모두가 다르며 그들은 자신들이 존재했던 수용소의 총체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1.37:1의 화면비는 바로 이 지점에서 파생된 결정일 것이다. 롱 쇼트와 같은 구도는 사용하지 않으며 배경을 파악하기 어렵게 하기 위해 아웃포커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모습까지 더해, 아카데미 비율의 화면비는 관객의 시야를 효과적으로 통제한다.


'재현의 윤리'라는 문제는 전쟁영화를 만들 때 항상 따라온다. 전쟁의 비극,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단지 질 좋은 구경거리로 소비하려 한다면 이는 분명 윤리적으로 크나큰 문제가 되는 지점일 것이다. 첨언하자면, 우리는 대부분 장르 영화를 관람하기 전 해당 장르에게 기대하는 장면들이 존재한다. 이는 오랜 기간 적용된 '장르'의 관습이자 관객과의 약속의 영역이다. 그러나 홀로코스트와 같은 소재를 다룬 영화에서도 관객이 '어떤 장면'을 기대하며 영화를 보는 태도가 과연 옳은 것일까? 더욱이, 모두가 '기대하는' 장면들을 클리셰처럼 질 좋게 선사하는 감독의 태도가 과연 맞는 것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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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측면에서 많은 평론가들이 짚고 넘어가듯 <사울의 아들>은 <쉰들러 리스트>를 위시한 다수의 홀로코스트 영화와 대척점에 서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사울의 아들>이 내내 보여주는, 주인공 사울을 타이트하게 잡는 동시에 배경의 포커스를 제하는 카메라의 모습은 이 '재현의 윤리'라는 태도에 있어 특별하다. 가스실에 진입한 유대인들의 장면을 재현함으로써 서스펜스와 같은 정서를 제공하기도 하는 여타의 영화들에 대한 안티테제로 기능하는 <사울의 아들>은, 기차를 통해 수송되는 유대인들의 모습에 포커스를 두지 않으며 가스실에서 자행되는 끔찍한 학살에도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비극을 재현하는 과정에 있어 자극적인 장면들이 관객의 감정을 오롯이 쥐고 흔든다면, 소재의 사용은 해당 사건의 비극성을 전달하기에 앞서 감독의 미학적 성취를 위한 기교로만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내 주인공의 얼굴만을 클로즈업하는 <사울의 아들>이 간헐적으로 특정한 시점을 비추는 장면들이 있는데, 이는 대부분 사울이 어떠한 대상을 정확히 바라보는 시점일 때가 바로 그 경우이다. 가스실에서 아직 숨이 붙어 있는 한 소년을 주목할 때, 카메라는 소년의 모습을 비춘다. 이어 의사가 소년의 목숨을 거두기 위해 다가갈 때 카메라는 약간의 움직임을 통해 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사울의 아들>에서 주인공 사울이 디디고 있었던 곳 그 이외의 공간의 모습은 알 수 없으며, 사울이 정확히 인지한 것들만을 정확히 볼 수 있게 된다. 이 영화를 다큐멘터리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 이 영화의 감독 라즐로 네메즈의 말대로 <사울의 아들>의 형식은 수용소에서 한 인간이 경험한 환경을 관객에게 인지시키는데 놀랍도록 탁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울의 아들>이 보여준 '윤리적 재현'과 궤를 같이하는, 알랭 레네의 1956년작 <밤과 안개>는 이 재현의 윤리라는 측면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예시일 것이다. 실제로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어 만든 이 영화는, 시간과 진실을 머금고 있는 과거 영상 자료와 사진들을 통해 꾸밈과 거짓이 없는 역사를 우리에게 전달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흑백에 대비되는 컬러 영상으로, 종전 후 남아있는 흔적들과 멈춰버린 것들에 대한 증언을 끊임없는 교차편집을 통해 관객에게 대비와 괴리를 선사한다.


방법은 무엇일까. 알랭 레네는 다큐멘터리를 택했다. 작금의 시선에서 이 영화를 마주한다면 결국 이 영화의 방법론은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영화라는 '창작물'이 온전히 재현할 수는 없음을 깨달은 체념적인 시선이 포함된 결과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 보면 이 지점까지의 방법이 영화라는 창작물이 가져야 할 최대한의 역할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게 된다. 비극을 프레임 안에 재현하는 과정에서 감독의 미학적 비전을 구현하기 위한 '설정'들이 영화에 개입하기 시작한다면 감독 스스로가 자신의 '예술적 성취'에 집착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을 흐려 주객이 전도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비극을 잊지 않아야 하기에 카메라는 역사를 추적하는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 완벽의 미학에는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분명한 진실에는 도달해야 한다. 그것이 비극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가장 진정성 있는 방법일 테니까.


다른 장르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전쟁영화에선 폭력적인 표현의 수위가 어느 수준을 유지할 것인가를 놓고도 많은 의견들이 오갈 수 있을 것이다. 정규전의 장면들이 등장하는 전쟁영화라면 그 폭력적인 장면들의 등장은 필연적인 수준으로 올라갈 것이다. 한 영화의 주제가 궁극적으로 어떤 숭고한 관념을 말한다 하더라도, 과연 표현의 수위에 있어 어디까지가 용납되며 어디까지의 선(線)이 존재하는 것일까. 그 숭고한 메시지를 위해 표현의 강도는 어디까지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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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관점에서, 2019년 개봉한 <페인티드 버드>의 이미지들은 흥미롭다. <페인티드 버드>는 우리가 전쟁영화에서 '보고 싶지 않은' 장면들로 가득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은 여과 없이 카메라에 담기며, 군인들은 열차를 탈출하는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잔혹하게 사살한다. 약탈 장면에선 어린아이마저도 그 비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외에도 성행위, 수간, 성폭행, 신체 훼손 등의 장면들이 직, 간접적으로 묘사된다. 논쟁은 발생한다. 왜 이렇게 적나라한 장면들로 영화를 조각하는 것인가? 의견은 다양하겠지만 나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이러한 방식이 영화의 기본 포맷인 흑백의 화면과 관련해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하는 연출이라 생각하는 입장이다.


흑백은 이 영화에서 효과적으로 기능한다.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특정한 어느 지역의 정서가 아닌, 이름 없는 한 지옥도 그 자체의 풍경이었을 것이다. 시놉시스에서도 영화의 공간은 동유럽의 '어느 나라'로만 설명될 뿐 구체적인 공간의 명칭은 특정되지 않는다. 총천연색의 다채로운 색감으로 공간을 파악하고 시간을 파악하는 관객의 접근법은 이 영화에선 통하지 않는다. 공간을 특정하지 못하게끔 기능하는 흑백의 화면과 함께, 이 영화에서의 잔인한 장면들은 전쟁이 불러일으키는 인간의 근원적인 광기를 드러내듯 날것의 연출로 만들어져 있다. 서스펜스와 같은 기교는 전무하며 카메라의 움직임은 유려하지 않고 투박하다. 신체 훼손의 장면들에서 우리는 카타르시스는커녕 일말의 '길티 플레져'마저 느낄 수 없으며, 인물의 성적 접촉이 일어나는 장면들에선 우리는 어떠한 에로스도 마주할 수 없다. 수위 높은 장면들은 오롯이 이 지옥도의 광기를 묘사하는 일념 아래 기능하고 있다. <아귀레, 신의 분노>, <지옥의 묵시록>,<컴 앤 씨>와 같이 영화 전체가 제정신이 아닌 듯한 분위기가 흐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 영화 역시 이러한 면에 있어선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굳이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장면들을 나열했어야 했는가."라는 의견은 힘을 잃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이 영화를 보면서는 그 표현의 수준이 과하다고 느낀 순간들도 있었다. 또한 간헐적으로 그 적나라한 이미지 자체에 대한 집착성이 느껴져 결과적으론 감독의 의도와는 사뭇 모순되지 않은 연출이지 않나, 조금은 갸웃했던 것이 내 솔직한 감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누구나 도전해 보고 싶지만 아무나 시도해 볼 수 없는 방식의 영화를 기어이 성공해 낸 감독의 대담성을 난 높게 평가하고 싶다.



전투 장면들이 들어있지 않은 영화들 중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은 인물을 기능적인 사용으로 소비했다는 점에서 아쉬웠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볼 때 개연성이라는 부분을 크게 고려하는 편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풀어내는 과정에 있어 많은 것들을 작위적이고 비상식적으로 배치하여 이런 것들이 궁극적으로 관객에게 거슬릴 정도로 눈에 띄게 된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 영화는 간편하게 관객의 감정을 공략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시종일관 결말의 비극성을 부각하기 위한 설정에만 몰두한 나머지, 영화의 주제를 진정성 있게 전달하기에 앞서 감상적이고 감정적으로 관객에게 호소한다는 인상이 강했다. 특히 최후반부, 영화의 메시지를 드러내기 위해 주인공을 너무나도 손쉽고 자극적이게 죽인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창작물이라는 틀 안에 있더라도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함부로 죽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 방식이 편의적으로 처리한 티가 여실히 드러난다면 이는 더욱 아쉬운 부분일 것이다.



러시아의 거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장편 데뷔작 <이반의 어린 시절>은 적나라한 표현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전쟁의 상흔이 한 소년에게 미치는 참혹함을 시적인 이미지를 통해 탁월하게 표현한 영화로 평가받고 있다. <이반의 어린 시절>은 전쟁영화에서 통상적인 전투 장면이나 혹은 군인들이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적나라한 장면이 등장하지 않으며, 심지어 적군인 독일군의 모습조차 영화 내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는 시종 주인공인 이반의 여정을 가까이 함께할 뿐이며 그의 행동들을 묵묵히 따라갈 뿐이다. 주목할 점은 영화 도중 간헐적으로 이반이 자신의 과거를 추억하는 장면들이 삽입된다는 것이다. 이반은 전장에 남고 싶어 한다. 어머니와 누나의 복수를 실현할 대상인 독일군에게 다가가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아이의 순수는 오직 과거를 추억하는 꿈 속에서만 보여지며, 과거와 환상은 그를 옭아매어 전장을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 이러한 악순환을 묘사하는 플래시백과, 이반의 심리를 가득 담아내는 클로즈업은 극적인 대비를 이루며 깊은 심상을 유도한다. 전쟁터에 놓인 이반의 모습은 영락없는 군인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그에게도 어린 시절 순수하고 행복하게 뛰놀았던 시절이 있었음을 관객에게 상기시켜 주는 '플래시백'은 이반의 비극적인 상황을 강조하는 동시에 전쟁이라는 부조리가 가지고 오는 영향을 여실히 느끼게 해 준다.


전쟁의 참옥함을 연출하는 데 적나라하고 폭력적인 방법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자극적이고 위악적인 이미지에 감독 스스로가 도취된다면 영화는 제 목적을 잃고 감독의 자의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배회하게 될 것이다. 간편한 방법으로 관객을 쥐고 흔드려는 방법이 아니라 시적 이미지를 통한 정서의 전달을 최우선적인 목표로 택하며 이를 끝내 이루어낸 <이반의 어린 시절>은 그 태도에 있어 모범적이라 불릴 만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몇 가지 예시를 통해 크게 장르의 위험성, 재현의 윤리라는 맹점, 자극적인 이미지들의 윤리성에 대해 짧게나마 생각해 보았다. 영화라는 예술을 향한 평가가 원체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하는 분야지만 특히나 윤리성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영화를 평가한다면 그 의견은 수만 가지가 생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표현의 자유가 존재하지만 윤리적인 책임 또한 존재한다. 전쟁을 찬미하는 영화는 다시는 만들어져선 안 되며, 전쟁의 형식 속에서 은밀히 폭력에 대한 매혹을 전달하는 영화 역시 생겨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완벽한 영화는 없기에 누구에게나 완벽한 전쟁영화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완전한 전쟁영화 역시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전쟁영화는 영원히 반전을 위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항상 예술이 나아갔던 방향은 불가능한 장벽을 향한 도전이었으며,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는 전투적인 시도였다. 전쟁영화 역시 그 불가능한 목표를 위해 전진하는 영화들이기에, 그들의 도전을 나는 언제나 강력히 지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