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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ddhi kim Dec 11. 2021

메타버스의 시대, 인지능력의 확장?

더 큰 세계를 향하여(Ⅰ)

우리가 살면서 관심을 두는 분야는 참으로 다양하다. 

소소한 일상에서 오는 즐거움과 보람도 삶의 활력소가 되며 주식이나 여타 경제, 사회 분야에 집중하는 일도 개개인으로서는 놓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다가오는 대선을 맞이하는 시기에 여러 가지 정치적 사건들에 열렬하게 참여하는 일도 나름 보람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더 큰 세계, 더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는 걸 한 번쯤 상기해 보면 어떨까 한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우주에 관한 탐구가 될 수도 있으리라. 재직 시절에 한 졸업생이 찾아와 했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휴일이면 연년생인 어린 두 딸을 무릎에 앉히고 책상에 컴퓨터를 켜서 지구와 우주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너희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이렇다는 걸 보여준다는 것이다. 당시 그를 보면서 참 훌륭한 아빠이며 행복한 아이들이라고 감탄했었다. 그도 지금쯤 어디선가 늙어가고 있고 그 딸 둘은 이미 성년이 되어 가정을 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그는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더 큰 세계의 존재를 알려주려고 했던 것인데 유아기인 아이들은 아빠의 설명이 전혀 이해는 못했겠지만 그들의 심성에 그 인상이 깊이 자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흔적은 아이가 자라면서 의문과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라 뇌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 관심을 지속적으로 계발했다면 아이들의 인지능력은 아주 탁월한 뭔가를 발현하지 않았을까 한다. 말하자면, 남이 느낄 수 없는 그 무엇을 느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느낄 수 없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때 우리는 흔히 “주관적”이라고 한다. 주관적인 것은 그야말로 남이 아닌 당사자 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렇게 본인 만이 느끼는 주관적인 인식을 철학 전문용어로 “퀄리아(qualia, 감각질),”라고 한다.   

 

필자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인간 인지 능력”의 위대함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마침, 한국인지 학회에서 <메타버스, 인지의 확장> 이란 주제로 세미나를 연다고 하니 인간의 인지 능력의 위대함이 메타버스라는 가상의 세계에서 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기 때문이다.       

 

이즈음 문화 산업을 비롯해 산업계 전반에서 핵심 키워드로 부상한 단어는 메타버스(Metaverse)다. 메타는 가상을 뜻하며 버스는 우주를 뜻하니 가상의 세계가 된다. 그런데 이 가상의 세계를 특수 매체인 안경을 이용해서 직접 그 가상의 세계에서 걸어 다니고 또한 다른 가상의 누군가와 대화도 가능하다. 지금까지는 나와 네가 일대일 소통이었다면 이제는 엄청난 대중이 함께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가상 세계를 통해서 내 창작 작품을 또는 내 의견을 서로 논의하고 평가하기도 해서, 실제로 BTS는 이 공연을 통해 전 세계 펜들과 함께 찐한 즐거움을 나누기도 했다. 또한 가상화폐를 통해서 자신의 창작품들을 사고팔 수도 있다. 이제 메타버스라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 것이다. 

 

이 가상세계에서는 실제의 나를 대신할 아바타를 만들어 나와 똑같은 모습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이 가상 세계에서 실제로 누군가가 또 다른 나를 만들어 내 생각이 아닌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변모시켜 타인에게 얼마든지 접근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인데, 일명 딥 페이크 사건들이 곳곳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매체에서는 전하고 있다.  

 

그러니 AI 전문가 등 메타버스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메타버스라는 새로운 가상세계는 이제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함께 연동되어 작동하니 인간의 인지 작용이 그만큼 더 중요 해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지 과학회>에서는 이런 세미나를 주최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논의에서 정작 인간 인지능력의 확장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찾기 어렵다는 것은 이 분야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몹시 씁쓸하게 만든다. 그도 그럴 것이 인지능력의 확장은 지속적인 퀄리아를 경험하는 데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인데, 그 퀄리아를 경험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쉬운 비유로 설명하자면, 거북이는 바다 물속에서 유유히 물을 가르며 살 수도 있고 해변으로 올라와 모레 위도 걸어 다니며 태양을 즐길 수도 있다. 그러나 물에서만 살 수 있는 물고기는 거북이가 바깥 해변의 멋진 여유를 아무리 설명해 줘도 도대체 이해가 안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물고기는 절대로 해변의 모래를 경험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물고기가 체험해 보지 못한 해변 자체를 부정해도 여전히 해변은 존재하며 그 여유를 즐겼을 거북이의 감상은 여전히 유효하고도 남는다. 그럴 때 물고기는 거북이에게 거짓말이라 거나 또는 단순히 초월적인?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치부해 버릴지도 모른다. 지금쯤 독자들은 이 이야기가 비단 물고기만이 아니라 인간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정확히 맞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누구나 경험하기 어렵다는 퀄리아를 느낀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왜 이것이 인간의 인지능력을 확장시킬 수 있는가를 설명해야 할 거 같다. 아주 쉽게 풀어 보기로 하자. 상세한 이야기는 지면이 너무 길어질 것 같으니까 이어서 올리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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