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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ddhi kim Sep 27. 2022

인간 인지능력의 무한 확장 가능성에 대해 답하다(Ⅰ)

초능력(?)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인간 인지능력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은 여전히 우리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즈음 실감하고 있다. 필자가 그동안 여러 번 올렸던 글들이, 제목에는 메타버스 시대와 연관 지어 그 의미를 설명하고자 했거나 아니면 인간 인지능력의 확장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설명했거나 간에 관련 글들에 대한 끊임없는 클릭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누구도 왜, 그 확장성에 대한 정확한 방법은 없이 변죽만 울리냐(?)는 식의 항의는 없었지만 필자는 이제 답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 설명의 툴(도구)을 얻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식적인 선을 벗어난 다양한 인식 현상을 흔히 비상식적, 초월적 혹은 신기(神技)라는 말로 포장해 버리려는 습관이 있다. 내가 알던 것과 다른 것에 대한 신비함을 느낌과 동시에 애써 무시하려는 속성도 보인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상식적인 이해는 눈 귀 코 등의 오감과 일반적인 의식 작용을 통해 뇌로 전달되는 것을 통해 느끼고 알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과연 그런 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내리는 판단과 상식과 지식이 전부 일 수 있을까? 필자는 이 의문으로부터 시작했다.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는가? 인간의 근원은 무엇일까? 저녁마다 석양을 보면서 느끼는 뼈저린 허무감은 도대체 무슨 감정인가? 인간의 능력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아인슈타인이 그의 뇌를 10프로만 썼는데도 온 인류의 눈을 새롭게 뜨게 했다면 나머지 90프로를 다 썼을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등등의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도저히 어찌할 바를 몰라 헤매다가 결국 필자는 인간의 능력이 어디까지 일가를 스스로 실험해 보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동서양의 고전들을 통해 답을 얻고자 섭렵했음은 물론이며, 얻고자 하는 해답을 얻기 위해서라면 뭐든 다 참여해서 해보는 적극적인 행위들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대로 모두 섭렵해 봤지만(저서 <노화,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참조), 예컨대, 중국의 도가 방식 그리고 인도의 요가와 불교 명상 등등을 해봐도 저들이 주장하는 고전에서의 능력을 실제로 경험하기란 요원했다. 

 

도대체 내가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이 말하는 완전한 능력이란 삼명(三明) 육통(六通)에 해당하며 이에 대한 복잡한 설명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보고 듣지 않아도 목표만 설정하면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해 봐도 타인의 전생을 알 수 있다는 엄청난 것이 아니 라도 나 자신에 대해서조 차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건 그 방식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 

 

이럴 즈음, 한 가지 사건이 내게 계기를 부여해 주었다. 

내 생애 영원히 잊지 못할 사건은 이러했다. 

학생들과 함께 2박 3일의 학술답사 차 안동 하회마을에 갔다. 첫날밤을 자고 아침 일찍 나와 혼자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500년이나 되었다는 큰 나무 앞에 서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비는 쪽지로 빽빽이 나무 둘레를 메우고 있었는데 그 앞에 서있던 나는 발아래서부터 뭔가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그것이 서서히 따습게 몸 전체에 퍼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무척 경이로웠으며 신비 그 자체로 온몸에 와닿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무로 간 이상 열심히 프로그램 따라 움직여야 했고 3일째는 안동을 떠나야 했다. 일상으로 돌아온 이후에 필자는 큰 나무만 있으면 그런 느낌을 다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하루 수업만 끝나면 매일같이 근처 산야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한 해 두 해 그리고 몇 년에 걸쳐 그러한 끊임없는 실험을 통해 하나하나 알아가기 시작했다. 긴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얻은 결론은 그 따스한 느낌은 그 큰 나무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가 발 딛고 서있는 대지, 땅이었으며 이는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음을 알았다. 하회마을의 그 나무 앞에서 처럼  따스한 기운을 내뿜는 몸에 좋은 기운과 수맥이라는 해로운 기운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평이한 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다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문제였다. 몇 년이 더 지나 필자는 그 따스한 몸에 좋은 에너지의 원천이 바로 대지의 자기장(magnetic field)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왜 어떨 때는 더 강하고 어떨 때는 그렇지 않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드디어 그 문제의 원인도 알아내게 되었다. 그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방금 언급했던 저서를 참조하기 바라며, 이 글의 주제가 우리의 인지능력 확장성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에 생략하고자 한다. 

 

이런 식의 실험은 자연에서 만이 아니라 우리의 몸까지 그 느낌을 실험해 보고 싶어졌다. 가장 좋은 대상이 당시 EBS에서 방영된 <명의> 관한 프로였다. 각종 질병들과 환자들을 보면서 그들의 몸을 느껴보기 시작했다. 필자는 그것을 스크린(screen)한다고 이름 지었다. 예컨대 위암에 관해 다루는 프로에서 나왔던 환자들을 보면서 내 위에 어떤 느낌이 오는가 하는 식이었다. 정말 그 프로그램은 내게 아주 훌륭한 교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인체의 모든 부위에 어떤 문제가 있을 경우 내가 어떻게 느끼는 가를 데이터화 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은 글로 쓰는 데이터가 아니라 내 몸에 아니 뇌에 차곡차곡 저장되었다. 그러면서 서서히 생면 부지의 사람을 만나도 그의 몸에 어떤 건강 문제가 있는 가를 스크린 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결과는 놀랍게도 모두 적중했다. 심지어 본인이 느끼지도 못하는 것을 알려주며 병원에 가서 진단해 보라고 하면 나중에 돌아오는 답은 "그렇다"는 거였다.       

 

필자가 그동안 어려움을 느끼고 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체험에 기반한 결과를 설명하려면 과학적 타당성에 입각한 객관적 설명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어려웠다.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필자가 체험에 관해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설명을 해내기란 정말 너무나 어려웠다. “내가 그렇게 느끼니까”,라고 할 때 누군가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는 놀라움에 덧붙여 초능력을 가졌다고 단정 짓거나 아니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되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모든 대상을 스크린 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는 것은 결코 초능력이거나 신비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지속적인 학습을 하면 얻을 수 있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에 우연히 넷플렉스에서 <루시(Rucy>)라는 영화와 <휴먼-몸의 세계->라는 시리즈 물을 보게 되었다. 안동 하회마을에 갔을 때처럼 이 콘텐츠들은 다시 내게 한줄기 빛이 되었다. 이제 비로소 모든 설명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필자가 오랜 기간 걸쳐 해왔던 지속적인 학습의 결과라면 당연히 얻을 수 있는 산물이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설명해주는 핵심 키워드를 미리 소개한다면, 뇌와 신경계 그리고 그것을 연결해주는 전류의 박동 그리고 인체의 놀라운 적응 능력이다.  이 메커니즘을 통한 능력 계발에 관한 설명은 다음 글 <인지능력의 무한 확장 가능성에 대해 답하다(Ⅱ)>편에서 상세히 소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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