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진 빚은 꼭 갚아야 한다-
나는 항상 경험해 보지 않은 것들에 대해 호기심이 많다.
그 가운데 하나가 죽음이다. 어차피 때가 되면 가겠지만, 죽음은 누구도 체험했다고 말할 수 없는 세계이므로 꼭 스스로 경험해보고 싶다는 호기심 어린 아련한 미련? 이 있다. 물론 여러 매체에서 죽었다가 살아온 사람들에 대한 경험담이 나오지만 결코 내가 해 본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어제는 문득 죽음의 정서를 느껴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일어나 가 보기로 했다. 그곳은 사철나무보다는 일 년생 나무들이 아주 울창한 긴 산책길인데, 여름에는 황홀할 정도로 그늘을 드리우는 멋진 길이지만 겨울에는 앙상한 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을씨년스럽고 괴이한 느낌마저 드는 곳이다. 그래서 겨울에는 잘 찾지 않는 곳이지만 어제는, 그런 곳이라면 죽음의 정서를 충분히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단히 마음먹고 충분한 느낌을 만끽? 하기 위해 생각을 비우고 한발 한발 걷기 시작한다. 그런데 방해꾼? 이 있었다. 바로 나무 사이사이로 고개를 들이미는 태양빛이다. 환한 햇살이 내 감상에 주책없이 끼어들어 어둡고 심각한 정서를 유지해야 할 내게 밝게 손짓하고 있었다. 혼자 중얼거린다. “그런 유혹에 절대 안 넘어갈 거야” 애써 차분하게 마음을 다잡고 정성을 다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데, 그만 다시 복병을 만났다. 일주일 전에 온 눈이 곳곳에 아직도 녹지 않고 엉겨 있었다. 스틱이 없으면 못 걸을 정도로 두텁다. 넘어지면 큰일이지 않는가. 다쳐서 내 의지로 못 움직인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다. 이때부터는 죽음의 정서 고 뭐 고 다 필요 없었다. 사람 하나 눈에 띄지 않는 산길에서 막연한 무서 움까지 몰려오며 오로지 한 생각 밖에 없었다. 중간 샛길이 나오면 무조건 산길 밖으로 탈출해야지. 부디 살아서? 나가야지. 애초에 확고했던 결의감은 다 어디로 사라져 버리고 오로지 몸성히 빠져나가고픈 의지만 충천했다. 드디어 5킬로 거리를 1.5킬로 지점에서 무사히 나왔다. 나오자마자 한 생각과 느낌이 가슴을 후벼 파며 몰려와 몸서리치게 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그 기막힌 절규와 순간, 순간들을.
살다 보면 안타까운 일은 다반사로 일어난다.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을 겪으면서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은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는 일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어디 한 두 번 일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곁을 떠나는 것부터 파산지경까지 내몰리는 경제적 충격, 소속 구성원들 사이에서 견디기 힘들 정도의 괴로움을 주는 왕따의 고통 그리고 누군가의 심한 갑질까지 모두 끔찍할 정도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일들이 한 개인이 아닌 사회적, 국가적 그리고 범 인류적인 것에 그 원인이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이 사건 사고 들에는 의례히 그 사회와 국가를 책임지고 있는 위정자들의 의무와 책임이 거론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안타까운 일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일수록 더 많이, 더 큰 일을,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데 그걸 재임기간에 안 한다는 거다. 그 자리에 올라가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 인가. 동네 통장만 하려 해도 천지의 기운이 응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우리 옛말이 있듯이, 하물며 국회의원 장관 대통령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보통 사람들은 아무리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일들을 그 지위로 올라 가면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해 약자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힘이 있지 않는가. 게다가 한 나라의 책임을 맡은 자들이 일이 터지면 나 몰라라 하는 걸 보노라면 내 몸에서 잘 순환되던 기가 그만 막혀버리는 느낌이다.
나는 불교의 업(業, karma) 이란 말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이것은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일상에서 경험되는 여러 가지 사례를 보고 든 확신인 거다. 왜 누군가는 배우지도 않았는데 피아노 앞에 앉으면 멋진 곡을 칠 수 있으며, 붓과 화폭만 있으면 많은 대중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가. 왜 누군가는 명문가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날 수 있는가 등등을 보면서, 도저히 이론적인 설명으로는 납득이 안되기에 업이란 단어를 수긍하며 받아들이게 된다. 적어도 하나님이 그런 복을 그들에게만 주었다는 것은 뜬금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내가 짓고 내가 받는다>는 업(業)이란 뜻의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등등의 고위직을 본인들이 소위 전생에 지은 바 있어 얻었다면, 그 자리에서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복을 지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저들이 그런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된 그 “복”은 저들 자신이 지은 것에서만 비롯된 게 아니라 우리 주권자들의 한 표, 한 표가 모여서 만들어 준 것임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는 거다. 그래서 문제다. 세상에서 가장 안타까운 일은 그런 지위에 올라간 자들의 허무맹랑하기까지 한 작태들을 보면서 왜 지나온 역사, 아니 불과 몇 년 전에 우리 모두가 겼었던 그 가슴 아팠던 일들, 그 과거 행위의 당사자들이 여전히 건재하고 있는데 왜 교훈을 얻지 못하는 가다. 아마도 현재 저들은 최고의 권력에 취해 운수대통을 자축하고 여전히 팡빠레를 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작 본인들에게 부여된 막중한 책임과 의무가 뭔 지 생각조차 안 해 봤을지도 모른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는 10.29 참사라는 끔찍한 일을 또다시 당하고야 말았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여러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우리는 정말로 복장이 터지지 않을 수 없다. 그 짓거리는 고작해야 몇 년간이겠지만 그동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터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희생되어야 하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평하지 못한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틀속에서 힘들어해야 하는가. 왜 저들은 지금의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멋진 일들을 마다하는가? 특별한 지위가 없는 일반 국민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그들이 대신할 수 있도록 그 막중한 자리를 만들어준 주권자인 우리에게 왜 그 빚은 갚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인가? 참으로 세상에서 가장 안타까운 일은, 바로 그런 막중한 자리에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자 들을 발을 동동 구르며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일인 것 같다. 다른 건 다 필요 없다. 우리 표로 지위를 얻었으면 모쪼록 갚아 달라. 빚은 갚고 봐야 한다. 그 빚을 제대로 갚지 못하면 눈덩이처럼 불어나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지 우리 모두는 똑똑히 알고 있다. 헛된 욕망과 무지로 생을 허비하지 말라. 삶이란 참으로 덧없다. 언젠가 시간이 지나 덧없음을 절절히 느끼며 후회할지도 모를 일이나 그때는 이미 늦었다. 나는 삶에서 가장 값진 교훈이 뭔가를 묻는 다면,
<사는 동안 때를 놓치지 않고 제때에 해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가장 멋진 삶이란 <후회 없는 삶>이다.
2023년은 부디 위정자들이 우리에게 진 빚을 제대로 갚을 수 있는 새 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