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랜만에 인간 내면심리를 밀도 있게 다룬 드라마를 안방에서 짜릿한 심정으로 지켜볼 수 있어 너무 좋았다. 아마도 내가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인간의 내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스토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특별히 영화광처럼 찾아볼 정도는 아니지만 주로 인간의 내면을 집약적으로 추적해 나가는 영화들은 유럽 영화들인 것 같다. 이것도 몇십 년 전에 봤던 감성에서 나온 것이라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인간의 심리를 쫓아가는 극들이 왜 관심을 유발하는가 하면, 극 중 배역들이 표현해 내는 인물들의 의식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며, 더욱이 그런 감정들을 통해 나오는 다양한 의식의 흐름들을 따라가노라면 다각도로 펼쳐지는 인간의 모습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범인을 찾는 데 뛰어난 한 프로파일러가 가족 사이에서 일어나는 불신을 기반으로 숨 가쁘게 전개되는 추리극이다.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치밀한 극본에 감탄하고, 또 그 내용을 밀도 있고 세련된 터치로 긴장감을 한껏 올려주는 연출에도 매번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순수창작극이라는 작가의 창의적인 상상력에도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마지막 방영분을 보면서 아쉬움과 더불어 명연기를 펼친 배우들에게도 열띤 감사와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이 작품이 이토록 진한 감동을 줄 수 있는 이유가 내게는 다른데 있다.
인간의 믿음이 확신으로 그리고 확고한 진리처럼 인식하는 것에 대한 허상이 작금의 세태와 똑 닮아 있음이다. 아니, 나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군상들이 보여주는 일반적인 속성을 극적인 전개스토리를 통해서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명대사가 마지막 회에 나온다. 하빈이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이경장에게 장태수는 말한다.
“정말 하빈이 가 범인이라고 확신해?”
“네”
“그럼 의심해도 돼. 그런데 이 경장의 그 확신부터 의심해 봐”
마지막 회에 나오는 이 대사는 작가가 시청자에게 전하고 싶은 핵심 메시지가 아닌가 한다.
보통 믿음으로 시작된 확신은 견고한 인식으로 내면에 자리하게 된다. 주관적인 가치로부터 출발한 믿음이 객관적인 데이터를 추가해서 확신으로 자리 잡게 되고, 이것은 자신의 확고한 인식으로 뇌리에 새겨진다. 이 과정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인지과정이다. 그런데 여기서 객관적인 데이터란 자칫 자신이 보고 픈 내용들만 끌어와서 엮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끌어들인 데이터들은 대부분 편향적으로 구성되니 자연히 한쪽으로 치우친 확신과 인식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이야기가 복잡하다면 간략한 예를 들어본다. 불가에서 전해오는 심쿵한 이야기다. 어떤 절에 부엌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는 공양주가 있었다. 늘 밥 짓고 설거지하며, 거기에다 스님들이 시키는 온갖 시중까지 다 들어주어야 하는 바쁘고 고달픈 생활에 찌든 공양주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그 공양주의 헌신 어린 봉사로 늘 편안함에 파묻혀 안락함을 즐기던 스님들은 놀라서 찾아보기 시작했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그런데 근처 다른 암자에서 앉은 채로 입적(사망)해 있었다. 사람이 죽음에 임박하면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렇게 앉아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그만큼 수행으로 다져진 인내와 정신력이 없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불교에서 큰스님들이 좌상 입적하면 대단히 도가 높은 분으로 칭송한다.
그 공양주의 입적한 모습을 본 스님들은 부랴부랴 그에게 큰절을 올리며 그들이 그동안 기껏해야 부엌 떼기 공양주라서 하대와 무시로 대해왔던 것을 뉘우치며, 그 공양주가 도를 통한 부처였음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것을 크게 자책하며 사죄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우리가 늘 알고 믿고 확신으로 가득 차서 살아온 많은 내용들이 어쩌면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암시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믿음과 확신이 실체와는 먼 허구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상에 존재하는 허상과 허구의 옷은 권위가 붙은 '이름값'이란 명목이 한몫한다. 우리가 "은행의 이자를 내려달라"거나 "먹고살기 힘드니 뭐라도 하자"고 아무리 외쳐봐도 세상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정부 고위관료라는 '이름값', 또는 국회의원이라는 '이름값'이 붙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이름값'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외침에 해결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통령이라는 최고의 '이름값' 딱지가 붙으면 어떨까?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일을 해낼 수 있다. 그래서 그 '이름값'에 빌붙으려는 자들이 득시글 거리며 꼬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름값'을 못하니 결국에는 허상과 허구라는 딱지를 그 위에 덧붙일 수밖에 없는 거다. 문제는 대다수가 그 '이름값'에 부합하는 일을 못하고 있다는 것도 화가 나는 일인데거기다 이권이 생기는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생존 욕구에만 충실한 집단들이 그 '이름값'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기반으로 일을 벌이다가 선량한 사람들에게 피해까지 입히는 일이 다반사이니 화는 커다란 분노로 변해가며 사회를 병들게 하고 인간의 자존감까지 짓 밝아 마음까지 멍들어 버리게 하는 행태가 벌어지고 있다.
문제는 그 '이름값'이 제대로 값어치를 못하고 있기 때문에 대신 허구나 허상이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 허상과 허구는 대상을 제대로 보고, 알 수 없도록 막을 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산은 산이고 강은 강일진대왜 그 산과 강을 있는 그대로 못 보는가.
별난 '이름값'들은 그것까지 방해하고 있다.
드라마에서 장태수가 이경정에게 던진 메시지는 이런 허상과 허구가 진실과 실체보다도 더 강력한 힘으로 난무하는 이 세상에다 던진 한마디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