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꼰대'가 되는가?

'꼰대' 3단계

by Siddhi kim

-꼰대는 결코 나이에 비례하지 않는다-


2024년을 보내고 2025년 새해를 맞이하는 분망 한 시점에, 나는 좋은 일 몇 가지가 있었다. 좋은 일이라면 사람들은 언뜻 재물이나 경사 혹은 승진 같은 것을 떠올린다. 그러나 내 기준의 좋은 일이란 일종의 성취감을 만끽했을 때이다.


어떤 일을 판단하고 결정하고 나아가 실행까지 된 다음, 그 결과물이 성공적으로 되었을 때 오는 성취감이다. 어차피 인생은 무한한 도전의 연속이 아닌가. 그 무한 도전 속에서 늘 판단과 결정 그리고 실행은 항상 연속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결과가 성공적이지 않다면 어떨까? 조금은 서운하지만 괜찮다. 그런 판단과 결정 그리고 실행으로 이어진 나름의 도전? 자체를 나는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설혹 그러는 사이에 손실이 크다고 하자. 금전적이거나 또는 마음의 상처 말이다. 그것도 내 판단과 결정에 들어야 했던 비용 지불이니 아깝거나 억울하지 않다. 괜찮다. 그러니 그 결과가 나를 헤집고 고통을 크게 주지는 못한다. 누군가는 그럴 것이다. 그럼 상대방은? 그 상대방은 설혹 서운해서 속상한 마음이 들더라도 그동안 온갖 정성을 다해 매 순간 훌륭한 연출가의 극을 한편 본 것 같은 기억을 떠올린다면 거기서 서운함은 멈출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왜냐하면 나는 늘 그렇게 상대를 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항상 즐겁다. 혼자서 환희와 행복을 만들어 내니 매일 매 순간이 즐겁다.


이런 나를 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한다. 가질 것 다 가졌으니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현직에 있을 때 사람들은 “교수니까,”그렇지. 퇴임한 지금은 “연금 받으니까,” 그렇지. 나는 가진 것 이라고는 매달 받는 연금밖에 없다. 그런데 같은 연금을 받는 사람들 인데도 그들은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늘 보고 느낀다. 더구나 현직에 있는 다수도 그런 식의 도전정신이 없다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았다.


이제, 퇴임한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다 보면 그들의 도전하지 않는 삶의 모습에서 지루함을 느낀다. 마치 인생을 다 살은 것처럼 손주나 봐주면 되고 골프나 치면 되고… 그것도 행복을 느끼는 방법 가운데 가장 손쉬운 것이긴 하다. 손주와 놀아주며 골프를 치다 보면 옥시토신의 호르몬이 듬뿍 쏟아질 테니 건강해지지 않겠는가. 그런데 매번 새로운 도전을 하며 좋은 결과를 얻었을 때 맛보는 엄청난 환희심을 그들은 과연 경험할 수 있을까? 비교불가의 이 느낌들을 한 번이라도 해 봤다면 또 시도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마치 마약 중독처럼!


문제는, 그런 도전의 시도가 나이 들어 노화가 진행되면서 오는 모든 여러 가지 부정적인 현상들을 충분히 파쇄시키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더욱이, 노화로 인한 다양한 부정적인 요인가운데 하나인 ‘꼰대’가 절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그런 ‘꼰대’가 나이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주 절감한다.



이제, 본 주제로 넘어가기로 하자.

내가 늘 신세 지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한 분 있다. 딱히 신세 진 것도 없지만 그래도 그냥 늘 뭔가 갚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분이다. 이번에 좋은 일이 겹치면서 그분에게 멋지게 한턱을 내고 싶었다. 즐거움도 나누고 그 결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는 설명도 신나게 하고 싶었다.


약속된 날, 무형문화재가 만든 멋진 옷을 정성껏 차려입고, 최고급의 음식으로 예약을 미리 하고 그리고 늘 습관대로 만날 사람의 몸상태를 미리 스크린 하고 등등 마치 연극 한 편을 연출하듯이 온갖 정성을 들여 준비했다. 연출자이니 조금은 일찍 갔다. 레스토랑 여주인은 차려입은 나를 보고 너무 멋지다고 예약된 방으로까지 따라 들어왔다. 아직 시간이 일러 그분이 도착 전이기는 하나 약간은 반가웠다. 잘 차려입은 나를 누군가 알아봐 주니 좋지 않은가. 드디어 그가 왔다.


그러고 보니 벌써 그를 만난 지 1년이 지나갔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맛난 음식을 서로 권하면서 화기 애애한 시간이 잠깐 흐른 뒤, 대화는 현시국이 너무 어렵다는 대화로 이어가게 되었다.


문제는 그때부터 일어났다. 그가 보수 성향을 가졌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일본이 방사성 폐기물을 바다로 배출한다는 뉴스가 전국을 흔들어 놓을 때였다. 바다의 방사능 물질 방출로 인한 공포로 인해 국민들은 소금을 미리 사서 재놓느라고 품절 현상까지 일었던 때였다. 그때 그는 정부나 보수들이 하는 말 그대로 한다. 바다 방사능 유출은 아무 위협이 못되며 괜찮다는 말을 열심히 설명해 나갔다. 그때는 그냥 흘려 들었다. 정부의 선전이 이렇게 지식인에게도 먹히는구나 하는 느낌으로 아무런 응답을 안 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계엄선포와 해제라는, 마치 미치광이가 날뛰고 돌아다니는 것처럼 온 나라를 통째로 들쑤셔 놓아 귀함을 받아야 할 국민들이 공포와 고통으로 그 찬 바닥에 나와 소리를 외쳐대야 하는 절박한 시점이다.


그는 말한다. 계엄은 잘못되었다. 그래도 이재명은 안된다. 그러면서 이재명대표에게 똥 묻히는 궤변을 열심히 늘어놓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대장동에서 90억 넘은 돈을 이재명이 다른 사람에게 돌려놓았다는 것이다. 이야기 중간중간에 나는 말한다. 이제 이런 정치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그는 나의 외침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열심히 또 이어 나간다. 마치 나를 설득시키지 못하면 안 되는 사명이라도 짊어지고 있는 모습 같았다. 세 번 정도를 그만하자고 하다가 드디어 내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래요, 당신 말 대로 전과 3 범이고 90억 도 숨겨놓고 몇십억짜리 50평 아파트에 산다고 합시다. 그래도 나는 성남시를 경기도를 시장, 도지사로서 시정 평가에 최고점을 받은 분이 한번 이 나라를 이끌어가 주었으면 합니다. ”


그래도 여전히 내 말에 반박하려고 시작하는 그를 보면서 그만, 벗어 놓았던 무형문화재의 외투를 들어 올려 입고 단추를 채우기 시작했다. 오늘의 내 연출은 실패했구나. 멋진 옷에 맛난 음식으로 한껏 즐거움을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웬만하면 그 즐거움의 비밀? 까지 털어놓으려 했었다. 즐거움은 나누면 배가 되니 말이다.


그의 그런 발언들은 지나간 1년 동안 그는 스스로 만들어 낸 기쁨과 행복 그리고 환희심을 못 얻었다는 증거다. 왜냐하면, 우리가 스스로 얻어 낸 성취감이 아주 클 때는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본성이 있다. 그 좋고 기쁜 일을 어떻게 입 꾹 하고 있을 수 있을까? 더구나 오랜만에 만나는 지인이라면 더욱 말하고 싶다. 나처럼 말이다.



언젠가, 아주 오래전, 몇십 년 전인 것 같다.

한국 아니 국제적인 최고의 연주가가 바람을 피웠다고 온통 매스컴이 난리 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런 가십성 기사에 열 올리면서 그를 매도하고 난도질하는 사람들과 매체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개인의 그런 사생활 때문에 그의 귀한 능력까지 배척받아야 하는가?”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그의 천재적인 연주에 수많은 대중의 마음에 울림을 주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혹은 그런 사람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그 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은 오직 그에게만 있는데….


이렇게 손쉽게 누군가를 매도하고 난도질하는 사람을 나는 “꼰대 기질”이라고 부른다. ‘꼰대’는 사전적인 의미로 ‘늙은이’를 뜻한다. 거기다 ‘꼰대스럽다’가 되면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일반화하여 그것 만이 옳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가르치려 든다. 권위적인 사고를 가진 기성세대를 속된 말로 ‘꼰대’라고 한다는 것이다.



런 꼰대는 결코 나이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꼰대’는 내 경험을 벗어난 낯선 것을 향한 호기심이 전무한 상태를 “꼰대 전초 현상”이라 부른다. 그러면서 자신이 가진 지식이나 경험을 중심으로 가족이나 주위사람들에게 그의 것?을 전파하려고 한다. 대상을 향해 일종의 잔소리가 시작되는 것이다. 자연히 충돌이 일어난다. 그는 참지 못하고 서서히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한다. 이것이 ‘꼰대’ 2단계다. 그러다가 그는 몹시 외로워진다. 아무도 그의 말에 귀기우려 주지 않는 현실에 절망하며 모두들 원망하기 시작한다. 점점 외톨이가 되어 가더니 몸도 마음도 서서히 지쳐간다. 갑자기 자신이 아무런 가치 없는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까지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제 그 자신이 가지고 있던 최후의 보루인 자긍심마저 무너져 버린 상실감으로 똘똘 뭉쳐진다. 이것이 3단계다.


3단계로 가면 되돌리기가 너무 어렵다. 그전에 수리? 가 되어야 한다. 나는 꼰대로 가기 최초 단계에서부터 반듯이 명심해야 할 것을 권한다. 바로 매사에 관심과 정성을 기울이라는 것이다. 호기심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관심과 정성에서 시작된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거나 음식을 먹거나 멋진 장소를 여행하거나 늘 호기심과 놀라움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들을 놓치지 말고 지나치지 말라는 것이다. 꼰대가 안 되는 최초이자 마지막 수단이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은 늘 무심하게 모든 것을 지나치는 경향이 있다. 그 무심함은 당신 마음을 사로잡게 될 어떠한 경이로움도 못 얻게 된다.


잠깐 예를 든다. 어느 날 나는 아주 높은 유명 산을 올랐다. 거기는 산행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와야 될 필수 코스처럼 된 곳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 산에 가는 것은 남들이 다하듯이 등산을 위한 것이 아니다. 거기 있는 강한 자기장을 찾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 등산에 필수요소인 스틱도 등산화도 그리고 등에 지고 갈 배낭도 메지 않았다. 간략한 몸차림에 운동화 차림이다. 주머니에 약간의 물과 쵸코렛 정도다. 오전에 올라가는데 벌써 내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냥 반가워서 말을 붙인다. “벌써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거예요? 장하시네요.”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정도 보이는 그 남자는 초면인 나에게 대뜸 일장 연설을 시작한다. 내용 인즉은 이런 산에 오면서 스틱도 없이 등산화도 안 신고 올라오면 어떡하느냐는 것이다. 반가움에 말을 걸었던 나는 머쓱해서 그냥 들었다. 그리고 걱정해 줘서 감사하다고 했다.


아마도 그는 내가 행여라도 다칠까 봐 걱정해 준 것 같았다. 그런데 그의 생각은 거기 까지다. 잠깐이라도 왜 이런 높은 산에 스틱도 없이 등산화도 안 신고 올라오는 사람의 목적성 혹은 이유에 생각이 미쳤다면, 아마도 그는 내게 어떻게 이렇게 간단한 옷차림으로 올라오는가 하는 물음이 먼저 앞서야 했다. 나는 그를 보며 아직 젊지만 당신은 이미 꼰대 기질로 들어서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외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렇다. 자기주장을 내세우기 전에 왜? 왜?라는 끊임없는 물음을 먼저 던져야 한다. 그 물음에서 그만 자기주장을 늘어놓을 시공간은 일단 멈추게 되는 것이다.

매 순간 경이로움, 그리고 새로움을 경험해 보면서 기쁨과 환희심을 느낀다면 꼰대가 될 여유? 가 도무지 없다. 스스로 창출하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기도 바쁘니 말이다.


나는 이즈음 3월 어느 날 있을 또 다른 연출을 아주 멋지게 준비하고 있다. 준비하는 중에도 흥분과 행복으로 매 순간이 즐겁다. 연출의 그림을 열심히 그려 나가기 때문이다. 이 나이에도 이렇게 가슴 뛰는 긴장과 흥분으로 마치 청년으로 돌아간 양 마냥 행복하다는 것이 너무 좋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드라마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