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유독 괴로울까.
이 끝은 어디일까
요즘 자꾸 8년전 간암으로
사망한 대학 후배가 생각 난다.
그리고 14년전 스스로 삶을 마감한
24살 가여운 영혼도 가끔 생각 난다.
아무런 유서도 남기지 않고
무슨 그리 많은 괴로움이 있어서
그토록 과음하고 여자친구 집 아파트에서
추락하여 사망해야 했는지
혹여 과음하고 실수로 발을 헛디딘것은
아닌지
실수든 사고든 병이든 일단
사망판정을 받으면 다시는 돌이킬수 없다.
이 세상모든 것들과 하직하게 된다.
너를 좋아 했던 사람들 모두가
좋아 하면 좋아 했을수록 더욱더 빨리
간절히 너를 잊으려 한다.
거의 대부분은
산자와 죽은 자의 사이에는
그리움이란 벽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만가지 감정들이 벽을 만든다.
그들이 내게 줬던 전자책들 pdf파일 글들 다 버렸다.
일부는 꽤 좋아 했었던 철학글들이 였음에도
자신이 곧 한달후에 죽을것을 안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먼 어두운 터넬로 들어 가는 기분일까.
죽기 한달던 대학교 후배는 메시지로 그랬다.
형 최근 반년 십년간 못 읽은 책들 다 읽었어요. 그런데도 뭔가 부족 해요.
그 후배는 화장품 장사로 5년사이에 수십억을 벌었었다. 그 몇해동안 손님 접대로 거의 밖에서 나돌고 술을 고래처럼 마셨다고 한다. 결국은 한번 망가진 간은 다시 회복 되지 않았다.
반년간 시골에서 자연인처럼 살다가 두살이 채 안된 아들 서른다섯도 안된 와이프 부모님들을 두고 다시는 못 돌아올 그 강을 건넜다.
그의 소식을 듣고 몇일간 우울 했다.
그의 위챗 모멘트에 올려진 사진들을 봐도 시골에서 자연인처럼 지내는 사진을 봐도 왠지 낯설었다.
결국엔 친구 삭제로 삭제 했었다.
그 전에 보낸 같은 방을 두달 넘게 쓴 후배는 위챗도 나오기전 2011년 5.1절 휴가때 하늘나라에 갔었다.
몇일간 친구들과 상해에서 즐겁게 놀고
헝주로 내려와야 하는 날 점심 친구랑 기분 좋게 상해서 이별주를 마시고 있는데 곱창 전골에 청도맥주 14병째 굽냐고 있는데 모를 지방 번호로 전화가 왔다.
누구 아무개 형 맞어요 ?
맞는데요.
하니까.
전화에서 아무개가 사망했는데 어쩌고 저쩌고 한다.
그 뒤의 말들은 들리지 않았다.
무슨 사기 전화를 재수없게 하냐고.
욕을 박고는 전화를 끊었다.
한참후에 또 같은 지역 고정 전화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안 받을려다가 받았는데 그쪽에서 화를 낸가 우리가 한가해서 파출소에서 그런 전화 하냐 형이란 놈이 무슨 그 모양이냐 하고 야단친다.
뭔가 조금 느낌이 달라져서.
어디신가. 물었다.
어느 파출소인데 당신 동생이 오늘 새벽
사고로 사망했는데 휴대폰에 형으로 저장되어 있어서 전화 했다고 한다.
단숨에 술이 확 깬다.
난 니들이 말한 그 사람 회사 선배인데
같은 기숙소에 살아서 형으로 저장한것 같다고 했다.
그러자 그 친구 부모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한다. 모른다고 하니.
암튼 지금 자살한것 같고 사망한것은 확실하니 후에 다시 전화 할거라 했다.
회사 노조 위원장 한테 전화 했다.
지난 주에 인턴을 마치고 회사와 인턴 종료 계약서를 싸인 한터라 어떻게 보면
정규직원도 아니고 2~3개월간 인턴 실습생에 불과 하니 알리는게 맞는지 헷갈리긴 해도 그래도 인명사고 인데 하면서 직접 상사 한테는 알리지 않고 회사의 경조사를 담당하는 소위 노조위원장이란 회사 선배 한테 전화 했다. 그도 어디서 술을 마셨는지
한잔 하고난 목소리 였다. 뭐시기 사망했다고. 걔 우리 회사 직원 이젠 아니잖아.
그래도 사람 사망 했는데 회사에 알려야 할지 몰라서 형한테 전화 했어. 형이 알아서
해주셔.
그 놈은 그날 끝내 회사 고위층에 알리지 않았다.
나름대로 알리지 않는게 낫다고 판단 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틑날 출근후 부서 동료와 같이 관리 담당 한테 알리자
눈을 크게 뜨면서 시겁해하며 놀랜다. 뭣이 사망 했다고
김 모모씨가.
그걸 왜 이제야 얘기해.
어제 노조위원장 한테 얘기 했는데요.
하니까.
어이 없어 한다.
알았어. 일단 내려가봐.
아마 노조 위원장 불러서 뭐라 혼내고
그룹사 임원급에게 보고 올린듯 하다.
관리 실장이 파출소에서 연락 오면
함부로 얘기 하지 말고 회사에 보고하고
얘기 하라고 주의를 준다.
그렇게 있는데 진짜로 파출소에서 연락이 왔다. 유서가 없는 자살로 의심되니까.
와서 조서를 써줘야 겠단다.
나 외에도 사내에서 가깝게 지낸 여자애 한명도 조서를 쓰러 오라고 했다.
둘이 수십키로 떨어진 파출소에 가서
있는 그대로를 조서를 쓰고 싸인 하고 나니
뭐라 이루 말할수 없는 막막함이 밀려 왔다.
연휴 전날 해방되어서 좋겠다고 농담 건네자 해맑게 웃으며 휴무후에 한잔해요 하면서 대답하던게 생생하게 기억 난다.
180키에 흰 피부 몸이 얄편했지만
잘생긴 편인 후배.
대학 졸업도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인턴 몇달만에 그런 최후를 맞다니
그 부모님들은 심정이 어떨까.
똑똑하고 붙임성 좋은 애였다.
회사 기숙사에서 같은 방에서 몇달간
매일 같이 시간을 보내고
내가 맡았던 업무를 인수 인계해주느라
그야말로 몇달간 밤낮을 붙어 있은 사람이
그렇게 허무하게 갔다는게 맡기지 않았다.
그에게서 야동 동영상도 얻었고 책보기를 좋아해서 특히 나처럼 철학서적 불교서적들을 좋아해서 그 애한테서 전자파일 책을 많이 얻어 가졌었다. 대만 남회근의 책을 특히 좋아해서 그 사람을 신선처럼 숭배 하던 순진한 아이였다.
어쩌면 갓 사회에 나왔던 내 모습을 많이 닮앗었다. 나보다 쾌활하고 똑똑하고 키크고 잘생겼지만 닮은 부분이 많았었다.
그것이 날 더 힘들게 했었던것 같았다.
어떻게 되어 회사 신입중에 사고난 후배 친구와 친구인 애가 있어서 장례식에 참석하기로 했다. 가지 않아도 되지만 회사에서도 법적으로는 책임지지 않아도 되지만 도의적인 면에서 약간의 조의금을 넣어 총무팀장이 참석하여 드리게끔 안배 했다.
나는 안가도 되지만 웬지 안간다는 것은
도의에 맞는것 같지 않어서 참석하기로 했다. 회사내에서 친하게 지내던 입사동기 여자애랑 총무팀장 나까지 셋이 참석 했다.
졸업 전이라 수많은 학생들이 참석하고
그의 부모님들이 참석 했었다.
학부원장이 추도사를 읽고 그렇게 식은 끝났다.
화장하기전 유리관속에서 고인을 볼수 있는 절차가 있었다. 검정 양복을 입고 누워 있는 모습 그토록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지금 이게 진짜인가. 그의 대학교 동창여자 친구는 소복을 입고 오열하고 그의 어머니도 오열하고 그의 동창들 모두 오열하며 울고 있고 그렇게 내 생애 첨으로 참석한 장례식이 24살된 어린애의 장례식이 되었다.
12살때 친할머니가 돌아 가셨을 때에는 산소를 써서 그때까지는 꽃상여를 타고 할머니가 산소에 모셔지는 것을 멀리서 봤을 뿐이다. 우리집에서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시골 단독주택인 집에서 전통장례식을 치르고 토장을 했다. 그때는 무서워서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는데 왜서 인지 내 친할머니가 세상 떴다는것이 너무 무서웠다. 매일 보던 할머니가 돌아 가셨다는게 숨을 쉬지 않은다는게 첨으로 죽음을 가까이에서 경험하는게 너무 무서웠다.
커서 조울증이 앓던 한살 어린 사촌여동생이 오히려 손도 잡아 보고 입안에 쌀알도 넣어 드리며 과정을 지켜 보았다고 한다. 내 사촌동생이 특히 간이 큰것인지
내가 어렸을적 겁쟁이였는지 그날 12살 나는 큰집 마당에서 사람들이 장례절차를 지내고 노제를 지내고 꽃 상여에 할머니를 태워서 산소로 향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난 왜 내 친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도 두려웠을까.
그럼에도 이젠 성인이 된 이상
그날 그 장례식에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참석 하기로 참석했다. 그래야만 할것 같았다. 몇달간 동거동락한 다섯살 많은 형으로서 응당 해야 할 도리이기도 했다.
검정양복에 비통한 맘으로 꽃다운 나이의 청년이 가는 마지막 길을 배웅 했다. 그 애와 가깝게 지냈던 여자애는 눈물 범벅이 되었다. 그후 반년도 지나지 않아 회사를 떠났다. 꽤 가까운 관계였다고 한다. 여자 친구가 있음에도 따로 여러번 데이트 하러 가는 것을 보기도 했다.
그것이 내가 제일 이해 안되는 부분 이기도 했다. 그렇게 자유분방한 애가 집안 형편도 넉넉한 애가 외독아들인 애가. 참. 한탄밖에 안 나온다.
그후로 매년 5.1절 휴가 주음이 되면 항상 그날 일들이 생각 나고 우울 해지곤 했다.
거의 십년이 지나서야 담담한 일로
살면서 겪을수도 있는 일로 받아들여졌다.
그후에 여러번 친구들 부모님들 부고를 들으면서 이젠 마흔을 넘기니 그런 소식들이 일이년에 한두번씩은 들려온다.
이세상을 하직한다는 것은 단지
호적에서 사라지고 육체가 먼지로 사라진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연이 끊기고 더이상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할수도 만질수도
좋아 하는 음식을 만들어줄수도
좋은 곳에 함께 여행할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부모 자식 관계 아닌 이상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당신과의 추억을 삭제하고 차단한다.
후배에게서 가진 야동들 전자 책들 모두 삭제 해버렸다. 갑자기 부정을 탄 물품이 되기라도 한듯이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다 삭제 해 버렸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더 오래 방황하고 우울한 느낌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약이다. 오랜 시간이 흐르니까.
지인의 일처럼 이렇게 술술 적어낼수도 있다.
목숨보다 더 소중한것이 무엇이 있으랴.
어차피 네가 사라지면 두세명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너와의 추억 함께 찍은 사진조차도 지워 버리려 한다. 죽은 사람은 안식하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그말.
그러니 많은것을 잡고 있으려 할 필요가 없다. 부모 자식외 그 누구도 널 혈육처럼 대할수는 없는 것이니까. 그것 역시 인간의 생존 본능이니까.
살아 있다는 것은 예쁜 배꽃을 보면 꽃을 볼수 있고 향기를 맡을수 있고 먹어보고 만져볼수 있고
느낌을 글로 표한할수 있다는 것
참 좋은 일인것 같다.
꼭 수백평 별장 한강변이 보이는 아파트가 아니라 시원한 공기를 마실수 있고
상큼한 오이를 따서 먹을수 있고 강가에서 낚시를 할수 있고 음악을 들을수 있고
책을 볼수 있고 글들을 쓸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참으로 좋은 일들인 것 같다.
너무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기보다는
내 가족외 한두사람만 가벼운 관계를 맺으며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고 빚지우지 않는 삶을 살기로 맘 먹었다. 내가 줄수 있는 것들은 글로서 나누며 이 생각들조차 언젠가 사라지면 그런대로 조용히 살기로 했다.
건강하게 살아 숨쉰다는 것 만으로도 참 좋은 일이니까.
하나님외 그 누구도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할수 없는 것이니까.
내가 느낄수 있는 하나님의 바램대로 살면 되니까.
그안에서 평온과 자유를 느낄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