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통지표 엑스레이

완곡한 표현 뒤에 숨겨둔 속마음

by silvergenuine

학년말에 받는 생활통지표의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을 읽어보면 '우리 아이가 이렇게 훌륭한 아이라니' 하는 뿌듯함이 밀려온다. 대체로 긍정적인 표현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성적을 입력할 때 부정적 내용을 지양하고, 꼭 적어야 한다면 발전가능성을 포함하여 적으라는 지침이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세태를 학부모들도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에 통지표의 내용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표현 뒤에 숨겨진 아이의 진짜 학교 생활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한다. '통지표 보는 법', '통지표 숨은 뜻' 같은 키워드로 유튜브를 검색해보며 현직 초등교사들이 제공하는 영상들이 많이 뜨는데 조회수와 댓글이 그 인식의 양상을 보여준다.


왜 좋게 좋게 적으라는 지침이 내려오는 것일까.

아무래도 학부모의 민원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싶은 마음 뿐 아니라 아이의 생활기록부에 어떠한 오점도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로 학기말 통지표에 거슬리는 내용이 있으면 학교와 교육청에 민원을 넣는 학부모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뭔데 내 아이를 평가해?"

"담임인데요."

"담임이면 다야?"

교사에게는 평가권이라는 것이 있다. 교사가 학생의 학업 성취 수준 및 행동발달특성을 판단하고 기록할 수 있는 권한을 의미하며 학생의 성장과 발달을 돕기 위한 책무이다.

열심히 가르치고 배워서 아이가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루었으며 아직 부족한 부분은 무엇인지, 부족의 이유에 아이의 성실성과 집중력, 흥미와 적성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면 아이의 진로와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으련만, 이제는 아이를 있는 그대로 기술해주는 것에 주저함이 크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지인끼리도 남의 아이에 대해 러쿵저러쿵 뒷말은 해도 앞에서는 듣기 싫은 말을 하지 않는다. 눈치 못 챙기고 입을 댔다가는 조용히 손절당하기도 십상이다. 이런 마음이 교사에게도 적용이 되어 내 아이에 대해 교사가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면 그 교사를 미워하고 책망하곤 한다.

교사는 교사일 뿐 아이의 부모도 아니고 이웃집 지인도 아니다. 교사가 아이를 바라보는 눈은 부모가 자기 아이를 바라보는 눈과 다를 수 밖에 없다. 나는 내 아이 밖에 못 보지만 교사는 여러 아이를 보는 사람이니 내 아이를 또래들의 발달수준에 비춰 객관적으로 바라볼 거라는 전제를 가져야 한다. 교사의 평가가 나의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또는 나의 아픈 곳을 찌르더라도 이를 아이 교육에 참고할 수 있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아이에 대해 학부모가 이것만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에 어떤 내용을 적으려면 몇 번을 썼다지웠다 하며 검열을 한다. 있는 그대로 적어주라고 하면 그냥 쓸 수 있을텐데, 좋게만 적으라고 하니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막막한 행동들이 있다. 평소 바르고 성실한 아이는 술술술 금세 써지는데 비해, 부정적 행동부터 떠오르는 아이들은 학기말 성적처리의 블랙홀이 되어 한없이 시간을 잡아먹는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알려는 주고 싶고, 적기는 어려운 겁니까?

수업 시간에 일어나서 여기저기 기웃거리기, 교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기 얘기부터 하기, 발표하는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전달이 안 되는 아이, 수업 중에 물풀로 코딱지 만들기, 지우개 썰기, 썰어낸 지우개를 친구에게 몰래 던지기, 수업 중에 쪽지 돌리기, 친구 약점 놀리기, 지각, 욕쓰기, 친구 따돌리기, 지독한 편식(집에서는 잘 먹는다고 할 때), 복도에 드러눕기, 돌 던지기, 친구 물건 함부로 사용하기, 버릇 없는 말투로 교사 간보기, 모둠활동에서 마음대로 안 되면 삐지기, 실험활동에 자기만 기회 독차지하기, 학용품 다 흘리기, 사물함을 쓰레기통처럼 쓰기, 국어 쓰기 안 쓰고, 미술 그림 안 그리고, 음악 노래 안 부르고, 수학 문제 안 풀고 시간만 보내기 등...


가장 편한 방법은 이런 내용들에 대해 아예 기술을 포기하는 것이다.

굳이 적으려면 변화발전가능성을 포함하여 적어야 하며, 동전의 양면처럼 좋은 면만 부각시켜서 쓰는 방법이 있다.

v 수업 시간에 주변을 기웃거린다->주변 상황에 호기심이 왕성하다.

v 남의 말은 안 듣고 자기말부터 한다->자기 표현 욕구가 강하다.

v 발표하는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안 들린다->자신의 생각을 자신감있게 표현한다면 더 큰 발전이 기대됨

v 수업 중에 딴짓을 한다->주의가 산만하다->수업 활동에 좀더 집중한다면 더 큰 발전이 기대됨

v 친구 약점 놀리기->친구의 긍정적인 면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쓰다보니 학기말 성적업무를 하는 기분이 들고 있다. 뭐라고 써야할지 막막해진다...

v 지각->매일 지도하는 내용일테니 안 쓰는 게 낫겠다. 차라리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아이들에게 근면성실하다는 말을 적어주는 방향으로

v 편식->'다양한 음식을 먹어보려고 노력(은)함' (정말 잘 먹는 아이라면 '급식을 골고루 잘 먹음'이라고 적는다)

v 복도에 드러눕기->자유로운 영혼을 지니고 있으며(이것도 안 되겠다)->공공질서를 준수하는 태도가 발전하고 있음(지도하고 있으므로)

v 돌 던지기 ->학부모 전화상담으로 전달, 통지표에는 기록하지 않는다.

v 버릇 없는 말투로 교사 간보기->역시 기록은 패스, 예의바른 아이에게 '웃어른에게 예의바르게 행동함'이라고 적는 게 빠름

v 주변 정리가 안 되는 아이->자기 주변을 정리하는 습관이 점차 형성되고 있음

v 모둠활동에서 잘 삐지는 아이->모둠활동에 협력하는 태도가 조금씩 발전하고 있음


어쩌면 이렇게 완곡하게 표현하려는 노력을 통해 '교사 스스로 아이의 특성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겠다'는 희망이 들지만 이건 마음 먹는 순간 뿐, 문제행동을 마주하면 리셋되는 감정이 드는 게 다반사다.

우리반 금쪽이의 작년 담임선생님이 적어준 행동발달 종합의견을 보면 '이렇게 훌륭한 아이를 내가 잘못 보고 있었던건가'하는 자기 반성이 든다.

통지표 엑스레이로 김선생 집에 같이 사는 아는 학생의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아는 것이 많아 친구들에게 지식을 나누는 데에 주저함이 없으며' !!!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안다고 막 아는 척, 잘난 척 한거 아니가? 했구만, 했어.

'재치있는 발언으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 주는 능력이 탁월함' !!

호시탐탐 말할 기회를 노리고 주변의 관심을 끌고 싶어하는 건가? 좀 과묵하면 좋겠구만...과묵은 내친구아들이 과묵하겠지...


한편 문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은 표현들이 있다.

수업 시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함,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태도를 지님, 교우관계가 두루 원만함, 독서를 즐겨하며 상식이 풍부함, 신체활용능력이 좋음, 글씨를 바르게 씀, 규칙을 잘 지키고 항상 바르게 행동함, 행사 준비에 적극적으로 참여함, 발표를 자신있게 잘함, 급식을 골고루 잘 먹음, 수업 시간에 바른 자세로 참여함, 예의바르게 인사를 잘함, 주어진 일을 끈기있게 해결함, 주변정리가 모범적임, 기본적인 학습 습관이 잘 형성되어 있음, 모든 교과 성적이 우수함 등등.


잘함은 우수하다는 말과 동급이고, 굳이 '매우' 우수하다고 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 너무 특출나서 그냥 우수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때 '매우 우수하다'고 적기도 한다. 매우 잘함은 '돋보임'과 통한다.

양호하다는 말은 보통(평균)이라는 뜻에 수렴한다. 옛날 나의 통지표에는 양호하다는 말이 너무 많아서 그 때는 양호실과의 상관관계를 생각할 뿐이었는데, 이제는 양호하다는 말이 그럭저럭 괜찮다는 말로 들린다.

노력을 요한다는 말은 말 그래도 노력을 요한하는 말이다. 웬만해선 노력을 요한다는 말을 쓰지 않는다. 오죽하면 노력을 요한하고 썼을까로 이해해야 한다.


교과평가(수행평가) 결과도 마찬가지이다. 보통 3단계(상-중-하/잘함-보통-노력요함), 또는 5단계(최상-상-중-중하-하) 평가를 사용하는데 과정중심평가라고 하여 학생이 성취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재지도를 반복하여 결국 '중'이상을 받도록 만든다. '노력요함'은 반복된 지도에도 끝내 성취수준을 넘지 못했을 때 어쩔 수 없이 주게 된다.

여기에 교과별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은 잘한 영역은 '~을 잘함', 중간 수준의 성취는 '~할 수 있음', 성취수준 미도달 영역은 '~~요소를 보완한다면 더 큰 발전이 기대됨' 정도로 표현한다.


뭣이 이렇게 복잡한지.

내가 아는 많은 교사들은 말한다. 옛날처럼 과목별 시험을 치고 점수대로 수우미양가(秀優美良可)를 써주는게 더 낫겠다고. 교사도 좋게 좋게 쓰려고 애쓸 필요없이 객관적 지표 그대로 적으면 되고, 학부모에게도 그게 더 직관적이고 정확하게 다가올 것이라고. 나도 교사로서, 학부모로서 찬성하는 바이다.

그러나 초등학교 성적 표기가 옛날로 회귀할 가능성은 낮다. 교육의 방향 자체가 결과 중심에서 과정 중심으로, 획일적 평가에서 개별적인 성장 중심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교사들이 객관적인 지표를 선호하더라도 교육 정책의 대세는 서술형 평가와 생기부 중심의 종합 기록이다.

결국 교사는 아이의 미흡함을 발전가능성이 있는 모습으로 순화하여 기록하는 교육적 해석자의 역할을 행한다. 평가 기록의 책무와 민원으로부터 안전하고 싶다는 현실적인 욕구 사이에서 교사는 매 학기 말 줄타기를 하고, 학부모는 통지표에 담긴 숨은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를 쓴다. 이 애매모호한 통지표는 내 아이를 향한 부모의 마음과 학생을 보는 교사의 마음이 교차하는 공교육의 한 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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